[논문 밖 인터뷰] 페미니스트×비건 실천을 연구한 비화

[연구 소개] 논문 「페미니스트의 비건 되기 경험 연구 : 지속가능한 페미니스트의 실천적 연대를 위해」는 페미니스트이자 비건을 실천하는 이들이 겪은 경험을 소개하고 이러한 실천이 어떤 의의를 갖는지 살펴보는 연구이다. 논문을 쓴 비화 역시 페미니스트이자 7년 전부터 비건 실천 중이다.
 
-‘비화’라는 별명으로 자신을 소개해주셨는데요. 어떤 의미인가요?
 
“‘비건 화이팅’의 줄임말입니다. 비건(Vegan, 동물을 착취하는 시스템에 반대하며 그로 인해 생산되는 모든 결과물에 대한 소비를 지양하는 사람)으로 사는 게 녹록지 않아서, 남들도 나도 이렇게 부르면서 응원하고 싶어서 지었습니다. 별칭 가지고도 비건 얘기 한 번 더 하고요.”
 
-페미니스트의 비건 되기 경험에 관한 논문을 쓰게 된 계기에도 이러한 응원의 의미가 있나요?
 
 
“저도 그렇고, 페미니즘 리부트(2015년경) 이후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사람들이 많죠.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비건 실천을 결심한 사람들도 꽤 되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페미니즘 각성이 비건이 되는 데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요. 페미니스트 각성으로 세상이 달라 보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천해 나가는 페미니스트에게 세상이 만만치가 않잖아요. 비건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래서 둘은 닮아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논문은 제가 비건이자 페미니스트로서 살면서 느끼고 경험했던 것들,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나누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됐구요. 페미니스트가 되었던 경험과 마찬가지로, 비건이 되는 과정에서 그들이 겪었던 소외, 갈등, 백래시 같은 것들을 살펴 보았어요. 견고하고 촘촘히 얽혀있는 가부장제, 인간중심주의, 비장애중심주의, 자본주의, 육식주의 등 사회의 맥락 안에서 ‘비건 실천’이라는 일상적 행위가 갖는 한계와 의미에 대해 고민해 봤습니다.”
 
-‘난 태어날 때부터 페미니스트였다’ 이런 사람들은 별로 없잖아요. 페미니스트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과정에도 많은 고민과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2등 시민 내지는 피해자로서의 여성을 체감하게 됐달까요? 그전에는 제가 여성폭력에 대해 무지하고 무심했어요. 내 인생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마치 제 자신은 그러한 일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처럼 살다가, 딱 느끼게 된 거죠. 대중교통에서도, 학교, 도서관, 직장에서도 내가 자라고 살아온 모든 공간에서 불법촬영부터 성폭력까지…. 그러면서 나의 사회적 공간이 위축되는 것을 느꼈어요. 그동안 내가 외면해 왔던, 도처에 있는 이 폭력적인 관계를 인식하게 된 거죠.”
 
-논문에서 보면,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은 폭력에 무뎌지지 않겠다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비건 실천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요. “다른 종에게 가해지는 구조적 억압과 폭력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같은 인간종으로서 피해자의 위치에서 누적된 여성혐오의 역사와 문화를 인식하고 저항하는 것과는 다른 층위, 즉 가해자로서의 성찰이 필요하다.”라는 대목이 인상 깊습니다.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과 비건이 되는 일은 많은 공통점이 있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요. 그리고 이런 성찰은 여성 내에서의 ‘차이’에 대한 성찰적 감각으로도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떤가요?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 비인간 동물을 착취하는 인간. 이런 식의 이분법적 도식이 성이나 종에 대한 본질화의 우려가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착취의 측면에서는 인간은 때로는 가해자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사람이 누구나 그냥 태어나서 살다 보면 연루되어버리는 동물착취를 비롯한 축산업이라는 구조가 구축되어 왔고요.

 
페미니즘이 ‘여성’에만 집중하는 운동이 아니고, 비건 실천도 마찬가지로 ‘동물’에만 집중하는 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위계와 차별 그리고 이분법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맞닿아 있기에 분명히 연결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처음부터 이러한 감각으로 비건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이전까지는 동물에 대한 시혜적인 시선이 더 컸고, 동물도 불쌍하고 환경도 살리기 위해 비건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위계적으로 아래에 있는 대상에게 베푸는 시혜는 그들의 권리를 옹호한다고 여겨지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 그 자체가 동등한 위치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한다.”는 대목도 생각나네요. 비화님 본인이 ‘동물화된 여성과 여성화된 동물’이라는 자각을 한 계기가 궁금해요.
 
 
“처음 축산업 안에서 동물이 어떻게 사는지를 본 건 오래전이거든요. 도살 장면도 나오는 다큐멘터리였는데 엄청 충격적이고 끔찍해요. 그렇지만 한 번의 충격으로 바뀌지 않더라고요. 이후에 여러 자료들을 보면서, 세미나도 하면서, 조금씩 공감을 쌓아갔죠.
 
그 사이 페미니스트로 각성하기도 했고요. ‘가임기 여성 지도’(2016년 한국에서 행정자치부가 저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임신이 가능한 연령대의 여성이 얼마나 분포해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표시한 ‘출산지도’)를 만들어 여성을 ‘아이 낳는 도구’처럼 여기는 것에 페미니스트들이 분노했었잖아요.
 
근데, 젖소는 그냥 ‘우유를 생산하기 위한 기계’로 여기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축산업 전체를 위해서도 계속해서 새끼를 낳아야 하는 어미가 필요하고요. ‘젖소가 임신하고 출산해야 젖이 나오는구나’라는 당연한 사실을 그제야 깨닫게 된 거죠. 이윤을 목적으로 임신 주기가 매우 짧게 이루어지고, 젖을 짜내야 하는 도구로 개량되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강제 임신과 출산 착유를 반복해야 함을 알았을 때. 자신의 새끼에게 먹이라고 나오는 젖을 인간이 대량으로 가져가기 위해 동물들을 가두고 태어나게 하고 착취하고 죽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저도 치즈, 유제품을 좋아했는데요. 그랬던 과거의 저를 포함해 사람들은 젖소를 우유가 나오는 기계 정도로 여기고, 실제 그 동물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관심갖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죠. 익숙한 무지와 무관심을 뚫고, 젖소도 인간 여성과 다르지 않은 임신-출산의 재생산 과정을 거치는 하나의 생명이라는 사실이 아주 어렵게 제 인식체계로 비집고 들어왔어요.”
 
-안다고 해서 모두가 그대로 실천하면서 사는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진심으로 와닿는 순간은 컨트롤이 불가하죠. 수나우라 테일러(예술가이자 장애운동가, 동물권 운동가)는 감옥, 요양시설에 있는 사람들, 돌봄 및 식사 준비를 타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장애인, 심각한 건강 문제로 비건 식생활이 어려운 경우 등을 이야기하며, 비건이 되는 데 따르는 가장 큰 어려움이 개인적 층위가 아니라 구조적 층위, 즉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데서 비롯된다고 짚는데요.
 
이 말은 비건 실천을 할 수 없거나 실천이 어려운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모두가 무조건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그렇지만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에 기대어 비건 실천을 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기보단, 일상의 매 순간 빠짐없이는 못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비건을 선택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에요.”
 

-비건 실천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안하는 팁이 있다면요?
 
“비건 실천을 거창하게 말고 플라스틱 줄이기, 쓰레기 줄이기 정도로 생각하고 웬만하면 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기 자신을 포함해 실천하는 사람을, ‘완벽할 수 없다면 안 하는 게 낫다고 여기지 않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실천에 시행착오와 모순과 한계가 당연히 있을 수 있음을 말해주고 싶어요.
 
비건 지향하는 지인이 있으면, 웬만하면 그 사람 만날 때만이라도 비건 실천한다 생각하고 비건으로 먹는 것부터가 시작이 될 수 있죠. 회식이나 행사 시 비건으로 준비하는 것은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을 참여시킨다는 측면에서 훨씬 더 파급력 있는 실천이죠. 전부 비건으로 준비하기가 어려우면, 비건 옵션이라도 마련하면 좋고요.
 
특히 다과 준비는 디저트, 빵류보다 간단한 과일이나 떡을 준비하고, 기타 기성제품일 경우 미리 성분표(밀, 대두만 들어가면 대충 비건일 가능성 높다!)를 확인해서 주문해 놓는 것도 좋은 시도가 될 수 있습니다. 행사 당일이나 시일에 닥쳐서 사려면, 살 수 있거나 아는 메뉴 등이 없어 논비건을 사게 될 확률이 높아요. 비건으로 음식이나 간식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주변에 비건 지인이나 친구에게 문의하면 어떤 것들이 가능하고 어떤 것들이 불가능한지 기쁘게 알려줄 거에요.
 
카페나 식당에서 비건 옵션을 물어보는 것도 좋은 실천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물어보다 보면 메뉴에 넣어줄지도 모르죠. SNS나 프로필 등에 논비건을 전시하지 않는 것도 실천의 한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이 많네요. 비건 앞에서 고기타령 같은 거 안 하는 것부터 시작해 봐도 좋겠습니다. 논문에 ‘킬조이’(Killjoy: 흥을 깨는 사람)라는 말이 눈에 띄였어요. 폭력에 눈감으면 모두가 편안하다고 퉁쳐지는 것을 거부하고, 친밀한 관계 및 사회 안에서 어려움을 겪지만 고집스럽게 ‘킬조이’로 살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도처에 있는 폭력을 예민하게 의식하며 살아가는 일이겠지요. ‘킬조이’로 살아가는 것의 어려움과 동시에 흥을 깬 일화들도 궁금합니다.
 
“흥을 깨는 일화는 너무 많죠. 매 순간? 하하. 여럿이 모이거나 단체 행사 같은 때에 누군가 애써 준비한 음식이나 다과 같은 거에 대해 말하지 못할 때도 있어요. 사람들은 고마워하고 감사 인사를 나누고 화기애애한 상황 속에서 저는 혼자 속으로 ‘나는 못 먹는데…’ 하며 생각하는 거죠. 좋은 걸 나누고 싶은 마음은 저도 너무 잘 알고 고맙기도 해요. 근데 또 그 자리에 비건이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못하는 분위기에서 저만 소외되고 지워지는 듯한 경험은 어렵고 복잡하거든요. 때론 상대방도 배려해준다고 하고 나도 어느 선에서 눈감고 넘어가려고 해도 서로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생기기도 하고요.
 
그런 자리에서 결국 ‘비건으로 다과를 준비했으면 좋았을 텐데…’ 같은 말을 하면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얼어붙죠. 어떨 땐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생각만 하기도 하고, 고민하고 말하기도 하고, 그때그때 달라요. 고기나 회 같은 게 대단히 좋은 것을 대접한다는 식으로 음식이 문화적으로 깊숙하게 의미로서 연결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고, 예외적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나 예외적 존재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훈련이 부족한 문제인 것도 같기도 하고요.
 
어떤 사람들은 저의 존재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내비칠 때도 많고요. 저만 아니면 불편함 없이 즐거운 식사나 디저트 시간이 될 수 있는데, 신경 쓰이고 저 때문에 먹고 싶은 걸 못 먹기도 하고 불편하니까요. 저를 소외시키거나, 불편한 티를 내거나, ‘너만 아니면…’ 식으로 저를 문제화해요.
 
그런 게 누적되다 보면, 사람이 아무래도 예민하고 화가 많고 불평불만이 많고 억울함이 쌓여 있는 상태가 되죠. ‘고작 먹을 것’ 때문에 별것도 아니고 치사스럽고 짜치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 자연스러운 상황을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데요. 세상은 그런 사람의 말을 듣지 않죠. 이미 억울한 제가 어떤 말을 하면 친절하지 않다고, 감정적이라고 또 문제를 삼고요. 저도 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게 되고요. ‘내가 잘 설명하지 못해서, 내가 더 포용력 있지 못해서, 내가 모난 성격이라…’
 

근데 그거, 페미니즘에서도 똑같잖아요. 내가 완벽하게 빈틈없이 설명하면 다를까? 내가 좀 더 친절하게 말하지 못해서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거는 패턴이다 라는 생각. 약자들이 무언가에 항의하면 ‘좀 더 친절하고 정확하고 부드럽게 말해줄래?’라고 대응하며 문제를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돌린다는 생각. 이것이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라 아메드가 『페미니스트 킬조이』 책에서 ‘이들이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하는 계속 튀는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느껴질 것이다.’라고 썼는데, 현실이 변화하지 않고 (우리의 말이) 현실에서 계속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계속 고장난 레코드판이 될 수밖에요.”
 
-논문에서 “인터뷰 참여자들의 일상 속에서 겪은 어려움을 가시화하는 작업은 규범적 질서에서 벗어남으로써 규범의 구조를 드러내고 문제 삼는 이들에 대해, 사회가 이들을 문제라고 여기지 않도록 또한, 스스로 자신이 문제라고 여기지 않도록 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썼는데요. 싸우고 있는 사람들, 지금 이 순간에도 ‘킬조이’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벽을 깨려다 내가 깨질 순 없잖아요? 포기하거나 깨지지 않기 위해 저는 ‘이것은 구조의 문제다’라고 계속 주문처럼 되새기는 것 같아요. 또 ‘킬조이’가 되면서 좋은 점들을 생각합니다. 다른 ‘킬조이’들을 포착하는 시선을 갖게 되고 수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요. 장애 접근성, 트랜스젠더 화장실 이용 문제 같은 것들을 보며 이들이 겪는 곤란함,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 비건 실천을 하게 된 후로 더 많이 공감하게 되었죠.
 
그래서 논문에도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낫고 우리 모두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모두가 실천하지 않는 것보다, 각자의 상황과 조건 안에서 부족하더라도 자신의 최선을 실천하는 나쁜 비건이 낫다.”라고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