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5월 12~14일, 예술의전당
문훈숙 단장·강미선·엄재용 인터뷰
뺑덕어멈 걷어내고 ‘본질’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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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심청’으로 데뷔한 엄재용과 마지막 무대를 가진 문훈숙 유니버설 발레단 단장. [유니버설 발레단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2001년 스물두 살의 신예 발레리노가 푸른 바다의 주인이 됐다. 심청의 ‘세 파트너’ 중에서도 가장 인자하고 온화한 성품을 품어야 할 역할. 혈기 왕성한 신예는 미소를 띠며 두 팔을 지느러미 삼아 폴 드 브라(port de bras, 팔동작)를 이어갔다. 그의 손끝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무대 위엔 하얀 물거품이 일 듯 우아한 파동이 번졌다.
“어린 데다 단장이랑 파트너를 하는 데도 아주 용감하게 하더라고요. (웃음)”
심청을 들어 올리고 붙잡는 동작마다 갓 데뷔한 새싹 무용수의 몸짓은 당당하고 안정감이 넘쳤다. 엄재용은 “데뷔작인데 왜 어색함이 없었겠냐”며 “단장님이 워낙 편하게 이끌어주고 중요한 동작마다 컨트롤해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40대로 접어든 ‘원조’ 심청의 마지막 무대였다.
이야기를 듣던 문훈숙 단장은 “(엄재용과) 함께 춤을 추며 경험이 없어서 힘들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안 했다. 처음부터 너무나 잘했고, 누구나 다 이 사람과 하고 싶어 했다”며 “그런 발레리노를 ‘골든 핸즈(Golden Hands)’라고 부른다”고 했다.
‘황금손’이 돌아왔다. 25년 전 ‘심청’으로 데뷔, 2016년 이 무대를 떠났던 그가 10년 만에 다시 ‘심청’을 만난다. 한 아이가 태어나 청년기를 지나 사회의 중추로 성장하기까지의 시간인 40년. 무수한 기억과 땀방울이 쌓인 시간 동안 발레 ‘심청’ 안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켜켜이 쌓였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회고가 모여 일궈낸 이 무대는, 아직 깨지 않은 꿈의 연장이자 K-발레의 살아있는 신화다.
이쯤 하면 K-발레의 고전…韓 최초 ‘글로벌 DNA’ 협업
“‘심청’의 해외 순회를 가면 현지 관객들이 당황하는 게 느껴져요. ‘효’라는 가치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정신이기에 처음엔 이해를 못 하더라고요. 공연 전엔 ‘효가 뭐야?’ 하며 웅성거리다가도, 심청과 심 봉사가 만나는 장면에선 인종, 국적을 불문하고 눈물을 펑펑 쏟죠.” (강미선)
1986년 초연 이후 ‘심청’은 프랑스 파리, 러시아 모스크바 등 전 세계 12개국 40여 개 도시에서 기립박수를 받으며 지속 가능한 K-발레의 고전으로 자리했다. ‘심청’은 우연히 눈에 띈 한 권의 동화책에서 시작됐다. 유니버설 발레단(UBC)의 창단 직후인 1984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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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로 40주년을 맞은 창작 발레 ‘심청’ [유니버설 발레단 제공] |
초대 예술감독인 애드리언 델라스는 영어로 번역된 ‘심청’에서 한국만의 효(효) 사상을 보고 “이 이야기야말로 한국의 창작 발레에 안성맞춤”이라는 확신을 발견했다. 벽안(碧眼)의 예술가는‘ 심청전’을 전래동화가 아닌, 발레라는 보편적 예술 언어로 치환할 수 있는 완벽한 서사로 본 것이다. 1976년 선화예중·고에 발레 지도교사로 초빙돼 ‘한국 발레의 산실’을 일군 그는 ‘한국 최초’로 우리 고전의 정수를 발레 언어로 번역한 주역이었다.
문훈숙 단장은 “1986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해외 관객들에게 한국 문화를 소개해야 한다는 생각을 기저에 둔 전략적 기획이었다”고 했다.
‘심청’은 1980년대 한국과 ‘외국인 창작진’이 긴밀히 협업한 최초의 ‘글로벌 합작’ 프로젝트였다. 델러스 감독의 안무는 이중언어 구사자였던 박용구 평론가의 대본, 케빈 바버 픽카드의 웅장한 선율을 만나 형상화됐다.
‘무모한 모험’이었다. 당시 한국 발레는 그야말로 황무지였다. 무용수들이 연습할 마루조차 없었고, ‘백조의 호수’를 온전히 소화할 기량도 되지 않았다. 문 단장은 그러나 “인도 문화를 입힌 ‘라 바야데르’, 스페인 문화를 입은 ‘돈키호테’처럼 한국의 ‘심청’은 왜 안 되느냐고 반문했다”고 돌아봤다. “와이 낫 코리안 컬처(Why not Korean culture)?”라는 질문이 ‘심청’의 시작이었다.
클래식 발레의 프레임 안에 한국의 미학을 입히는 작업은 정교한 조율의 연속이었다. “자칫 촌스러울 수 있는 요소를 걷어내기 위해 의상, 미장센, 움직임 하나하나를 다듬었다”고 문 단장은 강조했다. 한복의 실루엣을 살리되 발레의 라인을 해치지 않는 의상, 한국적 정서를 유지하며 서양 관객도 공감할 수 있는 극 구조를 설계했다. “한국 문화와 서양 발레의 균형과 조화”에 중점을 두고 태어난 것이다. 문 단장은 “오늘날 K-팝이 한국의 시스템과 해외 작곡가들의 협업으로 세계를 사로잡듯, ‘심청’의 탄생에 깃든 글로벌 협업이 40년을 이어온 성공의 발판이었다”고 회고했다.
UBC만의 색깔…‘뺑덕’은 없고 ‘본질’은 있다
“공연 영상을 볼 때마다 정말 신기해요. 3년 전엔 왜 저걸 못 봤지 싶은 것들이 많거든요. ‘우리가 이걸 이렇게 했나?’ 싶어서 계속 다듬게 되죠.” (문훈숙)
1986년 9월 초연 이후 40년, ‘심청’은 박물관의 박제된 유물이 아닌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진화했다. 문 단장은 ‘심청’의 장수 비결로 끊임없는 ‘혁신’을 꼽는다. 그는 “시대의 흐름과 트렌드에 따라 문화 콘텐츠를 향유하는 시각이 달라지기에,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수정 보완해 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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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로 40주년을 맞은 창작 발레 ‘심청’ [유니버설 발레단 제공] |
음악과 의상의 진화는 극의 완성도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초연 당시 세 명의 작곡가가 나눠 작곡했던 ‘심청’은 1988년부터 케빈 바버 픽카드의 음악으로 통일했다. 유려하게 흐르는 피아노 선율, 교향곡 풍의 웅장한 비장미가 ‘심청’의 서사를 극대화한다. 문 단장은 “발레 작품의 수준을 좌우하는 80%는 음악”이라며 “‘심청’은 총 3막을 한 명의 작곡가가 작업하며 수준이 확 올라갔다”고 돌아봤다. 해외 투어에선 공연 후 “CD를 살 수 있냐”는 문의도 받는다.
의상 역시 2000년 올레그 비노그라도프 예술감독 시절을 거치며 인물 간의 시각적 대비를 명확히 했다. 특히 용궁 장면의 투명하고 얇은 은색 비늘 타이즈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미장센이었다. 강미선은 “의상의 천이 굉장히 얇아 무용수들이 이 옷을 입으며 몸을 가리느라 바빴다”며 웃었다.
간택 장면 역시 비노그라도프 감독 시절 추가된 장면이다. 세 명의 왕비 후보가 한국의 전통 의상인 대례복을 입고 춤을 추는 장면으로 ‘한국의 미’를 보여주기 위해 추가됐다. 강미선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의상이라 여자 무용수들은 이 의상을 입고 싶어 세 약혼녀 중 한 명 자리를 탐내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한국무용을 배운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기회다. 왕비 후보가 나서는 장면의 안무는 어릴 적부터 전통 한국 춤을 연마해 온 문훈숙 단장이 직접 안무를 짰다.
무수히 많은 변화를 거친 ‘심청’은 지금 무대가 가장 ‘최신의 무대’다. 작은 디테일을 다듬는 ‘혁신의 과정’에선 ‘빼기의 미학’이 발휘됐다.
발레 ‘심청’엔 기존 ‘심청’과 달리 ‘뺑덕 어멈’이 없다. 원작에선 감초이나, 발레에선 사라진 캐릭터다. “심청과 아버지의 관계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고 문 단장은 귀띔한다. 심청의 서사와 작품의 메시지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2023년 무대부터 2막 체제로 압축하며 극의 템포를 끌어올렸고, 초반 등장 후 사라진 스님 캐릭터를 부활해 극 전체의 인과관계를 탄탄하게 엮었다.
이 무대는 유니버설발레단의 공연 중 유일하게 공연 10분 전 문 단장의 해설이 없는 작품이라는 점도 특징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에 해설 없이도 감동을 줄 수 있다”는 문 단장의 자신감이었다.
40주년, 40대 무용수들의 도전 “늘 오늘이 마지막 작품”
40주년의 ‘심청’은 작품의 역사뿐 아니라 무대를 지켜온 무용수들의 ‘시간’을 함께 축하한다. 피날레 무대(5월 3일)는 발레단에 오랜 시간 몸담아 불혹을 넘긴 간판 무용수들이 주축이 된다. 이 특별한 무대는 콘스탄틴 노보셀로프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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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주년을 맞은 ‘심청’의 피날레 무대엔 유니버설 발레단의 정체성이자 살아있는 유산인 40대 무용수들이 총출동한다. 강미선(왼쪽), 엄재용(중간)은 이번 무대를 통해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다. 사진은 강미선, 엄재용, 문훈숙 단장(오른쪽).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
UBC의 ‘황금손’이면서 문 단장을 시작으로 2016년 많은 심청을 거친 엄재용은 정작 강미선과는 연이 닿지 않았다. 숫자의 의미를 살려 40대 무용수들이 뭉쳐보자는 제안에 문 단장은 화통하게 화답했다. “그레이트 아이디어(Great idea)!”
사실 ‘심청’은 주역들에게 기존 클래식 발레와는 다른 차원의 기량을 요구한다. 문 단장은 “‘심청’은 발레 테크닉보다 ‘연기’가 우선”이라며 “동작이 곧 대사이기에 대사 사이의 공간을 신체언어로 메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기만의 지문으로, 관객에게 보이지 않는 텍스트를 문해할 줄 아는 역량이 캐스팅의 0순위 조건이다. ‘브누아 드 라 당스’의 주인공이자 UBC의 상징인 강미선(43)과 이현준(41), 콘스탄틴 노보셀로프(41), 지도위원 엄재용(47)이 ‘황금 라인업’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10년 만에 ‘심청’을 다시 맡은 엄재용에게 작품의 의미는 남다르다. 2017년 은퇴하고 지도위원으로 발레단을 이끌던 그는 “‘심청’은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기 전에, 딱 한 번이라도 무대에 서고 싶은 작품”이라고 고백한다. 24년째 발레단을 이끄는 강미선 역시 “중학교 때부터 때 꿈꿨던 역할을 40대까지 출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며 “처음 신청을 했을 때와 부모가 된 후 느끼는 감정은 이전과는 확실히 다르다. 예전과는 달라진 감정의 진폭을 점차 무대에 녹일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지난해 ‘호두까기 인형’을 시작으로 올해 ‘심청’까지 지도위원에서 다시 현역 무용수로 서는 엄재용에게 이 무대는 ‘두 번째 기회’다. 그는 “지도위원을 하며 무용수를 가르치는 역할이지만, 반대로 배우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며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볼 때면 ‘나도 저렇게 해볼걸’ 하는 아쉬운 마음들이 있었는데 이젠 마음껏 해볼 수 있게 됐다. 이런 기회를 가진다는 건 큰 행운”이라며 웃었다.
국내 어느 발레단에서도 마흔을 넘긴 무용수들이 주역을 맡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문 단장은 “엄청난 자기관리가 있어야만 허락되는 무대”라며 “경륜은 돈으로도 살 수 없고 속일 수도 없다”고 강조한다.
무용수들에게도 이 무대는 단순한 기념 공연이 아니다. 올해부터 지도위원으로의 역할을 맡고 있는 강미선은 “지금 서는 작품 하나하나가 내 인생의 마지막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임한다”며 “그래서 이번 40주년은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하고 간절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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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주년을 맞은 ‘심청’ 연습 현장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
40년간 같지만 다른 작품…가치가 일군 동력 ‘심청’
‘심청’은 40년간 같은 작품이면서 매번 다른 작품이었다. 인당수의 물보라를 넘어 ‘심청’의 궤적 끝에, 40년의 세월이 쌓아온 수만 번의 연습과 수백 번의 무대가 새겨진다.
이 작품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은 가치다. 서양의 창작진과 한국의 이야기가 결합한 ‘최초’의 글로벌 합작품으로 K-발레의 고전을 다시 썼다. “K-콘텐츠의 뿌리와 정신을 캐내”(문훈숙), “잊혀가는 ‘효’의 의미”(강미선)를 되새기는 ‘우리만의 콘텐츠’로 자리한 것이다. 40대 주역들은 초대 예술감독 시절부터 켜켜이 쌓아온 DNA를 바탕으로 UBC의 정체성을 증언한다. 선배들이 몸소 체득해 넘겨준 디테일과 정신은 이들의 몸을 통해 다음 세대로 흐른다. ‘심청’은 그저 오래된 창작 발레가 아닌 UBC가 축적해 온 미학과 역사, 세대가 응축된 작품이다.
무용수들에게 서양의 춤을 빌려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우리의 의상’을 입는 무대에 선다는 것은, 무용수들에게 예술가로서 자부심이자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의식이다. 엄재용은 “‘심청’은 여기(UBC)밖에 없는 작품이기에 더 의미가 깊다”고 했다. 이 작품이 한 편의 공연을 넘어, 한국 발레가 지나온 시간 그 자체인 이유다.
“발레는 악보가 아닌 몸에서 몸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수되는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40년간 무대 위에서 자신의 삶을 증명해 낸 유산 같은 무용수들의 ‘심청’은 세대와 지역을 넘어선 보편적 이야기이자, 미래로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문훈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