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수 전 뉴욕한국문화원장이 남긴 '경험의 시간'
“경험하지 않으면 남지 않는다”…참여형 문화로 전환
전시 아닌 축적…맨해튼 한복판에 쌓인 한글의 흔적
광고인 출신 ‘어공’, 문화원을 시장의 언어로 재설계
“지원 아닌 투자”…K컬처를 ‘시장’으로 본 3년의 실험[뉴욕=이데일리 김상윤 특파원] 맨해튼 32번가 인근, 유리와 콘크리트가 촘촘히 맞물린 거리 한복판에 들어선 뉴욕한국문화원 1층에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벽이 있다. 높이 20미터가 넘는 공간을 채운 색색의 한글 조각들 앞에서 방문객들은 잠시 서서 휴대폰을 꺼내든다. 몇 번의 터치 끝에 누군가는 이름을 남기고, 누군가는 짧은 문장을 적는다. 입력이 끝나면 그 문장은 곧바로 한글벽의 일부가 된다. 전시가 아니라 축적이다. 보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남기고 돌아가는 방식이다. 한 번의 관람으로 끝나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 쌓이며 의미가 더해지는 구조다.
이는 지난 3년간 뉴욕한국문화원을 이끌다 지난달 퇴임한 김천수 원장이 남긴 가장 선명한 흔적 가운데 하나다. 그는 퇴임 직전 인터뷰에서 이를 성과로 설명하기보다 하나의 변화로 정리했다. “문화가 작동하는 방식이 바뀌고 있다. 사람들이 보고 가면 끝이지만, 참여하면 그건 자기 것이 됩니다.” 그에게 문화원은 무엇을 보여주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각자의 경험을 남기는 구조여야 했다.
| | 김천수 전 뉴욕한국문화원장이 문화원 ‘한글벽’ 앞에서 미소 짓고 있다. (사진=김상윤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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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주는 문화에서 ‘경험하는 문화’로”김 원장은 이른바 ‘어공’(어쩌다 공무원)이다. 1980년대 제일기획에서 광고인으로 커리어를 시작해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브랜드를 키워온 인물이다. LA와 뉴욕을 오가며 ‘코리아’라는 이름이 낯설던 시절부터, 그것이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 잡는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삼성전자가 세계 시장에서 ‘코리아’를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하던 시기 역시 그의 커리어와 맞닿아 있다. 이런 경험은 문화원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문화는 행정이 아니라, 결국 시장에서 작동해야 하는 콘텐츠라는 인식이었다.
부임 당시 그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단순했다. 왜 사람들이 이곳에 와야 하는가. 뉴욕은 세계에서 가장 경쟁적인 문화 도시다. 자본이 모이고, 창작자가 몰리고, 검증된 콘텐츠만 살아남는다. 더 큰 예산과 더 강한 브랜드가 넘쳐나는 환경에서 문화원이 기존처럼 전시와 행사를 반복하는 방식으로는 존재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봤다. 그는 ‘전시’라는 형식 자체를 다시 들여다봤다. 같은 것을 동일하게 보여주는 방식으로는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기 어렵고, 다시 찾게 만들기도 힘들다는 판단이었다.
그가 선택한 방향은 ‘경험’이었다. 같은 공간에서도 각자가 다른 이야기를 가져가게 만드는 구조, 그것이 문화원의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봤다. 광고에서 체득한 원리이기도 했다. 메시지를 보는 것과, 그 안에 참여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든다는 것. “문화는 설명이 아니라 경험으로 남아야 한다”는 그의 인식은 문화원 운영 전반에 반영됐다. 이는 글로벌 그룹 BTS가 팬 ‘아미’와 경험을 공유하며 관계를 확장해온 방식과도 닿아 있다.
이 접근은 K컬처를 정의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K컬처를 K팝이나 음식 같은 개별 콘텐츠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이를 ‘모던 헤리티지’라는 하나의 감각으로 묶는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국가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정’이라는 인간 중심의 가치를 유지하고 있는 사회라는 것이다. 첨단성과 전통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구조, 그 자체가 K컬처의 본질이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를 뉴욕식으로, 즉 세련되고 역동적이며 참여 가능한 방식으로 전달해야 한다고 봤다.
한글벽은 그 고민이 집약된 결과물이다. 한글을 설명하지 않고, 직접 쓰게 만든다. 읽지 못해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참여하는 순간이다. 이 벽에는 지금까지 수천 개의 문장이 쌓였다. 누군가는 사랑을 적고, 누군가는 미래에 대한 다짐을 남긴다. 그 문장들은 사라지지 않고 공간의 일부로 남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겹쳐지며 하나의 집단적 기억이 된다.
| | 김천수 전 뉴욕한국문화원장이 문화원에서 퇴임을 앞두고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뉴욕=김상윤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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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인의 시선…문화원을 ‘시장’으로 보다운영 방식에서도 그의 접근은 분명했다. 문화원을 프로그램을 집행하는 기관이 아니라, 연결을 만들어내는 플랫폼으로 봤다. 특히 기업과의 관계에서 기존과 다른 방식을 택했다. “지원해달라고 하면 한계가 있다. 대신 투자할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광고인의 언어다. 기업은 명분이 아니라 효과에 반응한다. K컬처가 일정 수준 이상의 주목도를 확보한 지금, 이를 마케팅 자산으로 설계하면 기업은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된다는 판단이었다. 실제로 문화원의 주요 프로젝트는 상당 부분 민간 협업으로 진행됐다. 기부가 아니라, 함께 설계된 구조였다.
그는 문화가 ‘시장’에서 작동해야 지속성을 가질 수 있다고 봤다. 일회성 행사나 단발성 이벤트로는 문화의 영향력이 확장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관객이 다시 오고, 또 다른 사람을 데려오며, 반복적으로 경험이 쌓일 때 비로소 문화는 힘을 갖는다는 판단이었다. 한글벽 역시 그런 구조를 염두에 둔 장치였다. 한 번 보고 끝나는 공간이 아니라, 참여와 재방문을 유도하는 구조다.
그는 이 과정에서 K컬처의 위상이 달라졌다고도 진단했다. 과거에는 공공이 나서서 가치를 만들어야 했다면, 이제는 기업이 그 가치를 활용하려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다만 모든 영역이 시장에 맡겨질 만큼 성숙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공공과 민간이 함께 움직이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봤다.
행정이 아닌 경영…선택과 집중의 3년그는 문화원 운영을 ‘행정’이 아니라 ‘경영’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행정은 평균을 나누는 일이고, 경영은 선택하는 일”이라는 표현도 인터뷰에서 나왔다. 무엇을 할지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지를 결정하는 것이 전략이라는 의미다.
이 같은 인식은 자연스럽게 ‘타깃 설정’으로 이어졌다. 동포나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뉴요커, 그중에서도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층, 특히 한인 2·3세를 핵심으로 설정했다. “이들이 움직이면 친구들을 데리고 온다”는 그의 설명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확산 구조를 반영한 것이었다.
제한된 예산과 인력은 이런 전략의 필요성을 더욱 분명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을 고르게 추진하는 방식으로는 아무런 성과도 남기기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실제 문화원의 연간 예산은 100만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고, 인력은 10명 수준에 머물렀다. 그는 “중요한 곳에는 더 많은 자원이 들어가야 한다”며 기존의 ‘평균 배분’ 방식이 전략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K컬처의 현재를 ‘과도기’라고 진단했다. 과거에는 정부가 나서서 가치를 만들어야 했다면, 이제는 기업이 그 가치를 활용하려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다만 아직 모든 영역이 시장에 맡겨질 만큼 성숙한 것은 아니라고 봤다. “아직은 누군가 먼저 시작해야 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문화원의 역할은 그 사이에서 새로운 영역을 발굴하고, 초기 경험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그 과정에서의 한계도 분명했다. 그는 가장 큰 어려움으로 인력과 보상 문제를 꼽았다. “직원들이 정말 많이 노력했는데, 그에 맞는 보상을 해주지 못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는 말은 인터뷰 내내 반복됐다. 뉴욕이라는 도시의 중요성과 비용 구조를 고려할 때, 기업처럼 보다 전략적인 투자와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한글벽 한쪽에는 김 원장이 남긴 문구도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눈보라가 꽃을 피우고, 비바람이 열매를 맺습니다.”
그는 이 문장을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거저 되는 것도 없고, 억지로 되는 것도 없다”는 말로 덧붙였다. 과정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김 원장이 떠난 뒤에도, 맨해튼 한복판의 그 벽은 그대로 남아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멈춰 서고, 여전히 문장을 남긴다. 누군가의 흔적 위에 또 다른 흔적이 쌓인다. 그 반복 자체가, 지난 3년간 그가 뉴욕에 남긴 가장 분명한 실험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