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애 | 논설위원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대구시장 후보가 대구 엑스코를 ‘박정희컨벤션센터’로 이름을 바꾸고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와 교류하도록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지역주의, 진영 논리를 넘어 진정한 국민통합에 힘쓰겠다’는 취지다. 2014년 첫 대구시장 도전 때 내걸었던 박정희컨벤션센터 건립 약속을 다시 꺼내든 것이다.
‘대구에선 정말 박정희 마케팅이 효과가 있나.’ 선거 때마다 나오는 클리셰 같다는 생각이 스친 것도 잠깐, 이상했다. “아무리 선거 승리가 중요해도 그렇지, 어떻게 박정희를 내세울 수 있나!” 예전 같으면 민주당 안에서 불거져 나왔을 법한 이런 비판이 자취를 감췄다. 대체로 “이해한다”는 분위기다. “보수의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 섞인 말들이 더 많이 들려왔다.
격세지감이다. 2015년 2월9일,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민주당의 전신) 신임 대표는 취임 첫행보로 서울 동작구 현충원의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했다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제 갈등을 끝내고 국민통합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했으나, 당시 문 대표와 함께 선출된 5명의 최고위원들은 ‘정체성 부정’이라며 참배에 동참하지 않았다. 특히 정청래 당시 최고위원은 “독일이 유대인의 학살에 대해서 사과했다고 해서, 유대인이 히틀러의 묘소에 가서 참배할 수 있겠냐. (이승만·박정희의 후예들이) 아직 그 정도의 사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행보는 적절하지 않다”며 문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11년이 흐른 지금, 이제는 민주당 대표가 된 정 최고위원은 김 후보의 ‘박정희 마케팅’을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김 후보를 “진짜 대구 사람”, ”대구 선거에서 이길 유일한 필승 카드”라고 치켜세우며, 당 차원의 지원을 약속했다.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논쟁적 인물이고, 그사이 과거사 문제에 대한 괄목할 만한 화해의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민주당의 달라진 태도를 설명할 만한 ‘상황 변경’ 요인은, 대한민국 역사에 두번 다시 없을 것만 같던 불법 비상계엄 선포가 다시 이뤄지고 대통령이 탄핵돼 정권이 교체됐다는 것 정도다.
새삼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해 대선 직전 했던 발언이 떠올랐다. “우리는 원래 진보가 아니다. 사실 중도보수 정도의 포지션을 갖고 있다. 진보 진영은 새롭게 구축돼야 한다”던 그 말. 실제로 윤석열 전 대통령이 탄핵된 뒤 치러진 대선 이후 국민의힘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쪼그라들고, 민주당에는 ‘뉴 이재명’이란 새 지지층이 유입되고 있다. 이 대통령의 말대로 “민주당이 중도보수 정도로, 오른쪽을 맡”는 구도로,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이 변화하고 있는 것일까. 김 후보의 박정희 마케팅에 대한 비판 실종은, 이를 예고하는 하나의 징후가 아닐까.
사실 따지고 보면, 분단 현실 속 양당제가 고착되면서 ‘민주당은 진보, 국민의힘은 보수’로 손쉽게 규정됐을 뿐이다. 강령만 보면 두 당이 크게 다르지도 않다. 어쩌면 이제야 제대로 된 정체성 논쟁을 벌일 때가 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조국혁신당이 내건 ‘국힘 제로’란 구호대로 국민의힘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참패해야 한다. 오해하지 마시라. 여기서 참패해야 할 대상으로 꼽은 국민의힘은 ‘보수’의 대명사가 아니다. 윤 전 대통령 탄핵 이후에도 국민의힘 주요 인사들은 여전히 “최종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고 우기고 있다. 강성 지지층 눈치만 살피며 사과 같지 않은 사과로 내란 사태에 대한 책임 인정을 회피하고 있다. 보수의 핵심 가치인 법치주의·헌정질서 존중과 정반대로 가고 있는 이들을 어찌 보수라고 할 수 있겠는가. 국민의힘 당적을 버린 홍준표 전 대구시장의 말마따나 지금의 국민의힘은 “이익집단으로 변질된 조직”에 불과하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고, 거대 여당을 견제할 야당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국민의힘이 그런 야당이 될 수는 없음은 분명하다. 회초리 한대 맞고 정신차릴 수준이 아니다. 국민의힘이 그토록 외치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국민의힘은 선거 참패 뒤 해체해야 마땅하다.
가짜 보수, 껍데기 보수가 사라진 자리, 거기에서 진짜 진보와 보수가 사회개혁 방향을 두고 진검승부를 시작해야 한다. 그때가 되면 더는 박정희 마케팅 따위, 이를 둘러싼 논쟁 따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당연한 말이, 정말 당연하게 실천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