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화 대기자21세기 인류는 원자를 쪼개고 우주의 기원을 탐색할 만큼 똑똑해졌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여전히 어떤 ‘절대적 가치’에 집착하는 원시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현대인이 안고 있는 문제는 가치의 부재가 아니라 특정 가치를 의심 없이 신성시하는 태도, 즉 ‘우상화’다.
작금 서아시아(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의 난무 역시 핵개발, 에너지자원, 혹은 지정학적 헤게모니 다툼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양쪽 사회 깊숙한 곳에 각기 다른 가치가 절대화되며 충돌하는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이란은 종교적 정체성과 신정 질서를 국가의 정당성 기반으로 삼고 있고,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인류 보편적 명분으로 내세운다. 문제는 이 가치들이 현실 정치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느냐다.
가치는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토대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집단에 의해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로만 기능할 때, 타자를 배제하는 기준으로 변질되기 쉽다. 국제인권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이란 집권층에 문제를 제기해 온 표현과 사상의 제약과 강경한 형벌 사례들은 종교적 질서체계가 개인의 자유 및 기본권과 충돌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신앙 그 자체라기보다 소수집단의 해석과 체제가 권력 유지의 논리와 결합할 때 발생하는 긴장이다.
문학작품 속에서 예언자 무함마드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작가를 공개적으로 살해할 것을 촉구한 사례는 보통 사람들에게 이슬람 종교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심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미국이 내세우는 민주주의 역시 언제나 일관된 모습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를 확산한다는 명분 아래 이뤄지는 군사 개입과 막대한 전쟁 비용은 종종 자국 내 문제와 대비된다. 수십 년 째 방치돼 노후화된 전국적 사회 인프라 실태, 심화되는 경제적 불평등, 점점 더 첨예화되는 공동체의 균열은 민주주의 이념을 확산한다는 정당성과 합리성을 깎아먹는다. 특히 국민 다수의 뜻에 반하는 무력의 행사는 권한을 위임받았다 하더라도 정권의 존속을 위해 바람직한 게 아니다.
이 지점에서 질문은 간단해진다. 우리가 믿는 가치가 진실 되게 작동하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행위의 정당화를 위한 수사로 동원되고 있는가.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무력충돌은 이러한 질문을 더욱 벼리도록 한다. 각자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내세우지만, 그 결과는 반복적으로 동일하다. 파괴되는 것은 상대방의 우상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들의 삶과 일상이다. 그들이 우상을 공고히 하게 만들 뿐이다. 신의 이름으로, 혹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폭력은 결국 정당성의 근거를 스스로 약화시킨다.
가치가 절대화되는 순간, 그것은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최면을 거는 프로파간다일 뿐이다. 진정한 신념은 강요가 아니라 개인의 의지로 인해, 그리고 끊임없는 질문 속에서 강화되고 유지된다. 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상식 수준에서 이해하는 민주주의야말로 보편타당성으로 나아가는 관문이랄 수 있다. 그것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하고 조정되는 과정 그 자체에 가깝다.
이번 중동전쟁이 남긴 것은 단지 경제적 손실이나 지정학적 불안만이 아니다. 인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온 인간의 존엄성과 이성에 대한 신뢰가 시험대에 오른 점이다. 특정 가치가 독점되고 그것이 권력의 구호로 사용될 때 사회는 점차 타협과 공존의 공간을 잃어간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가 믿는 가치를 다시 성찰하는 일이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그것이 진정 타인과 공존하는 기준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배제와 정당화의 논리로 이용되고 있는지를 묻는 일이다. 가치가 우상이 돼버린 것은 아닌지 말이다.
우상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외부 적을 제거하는 게 아니다. 자신이 절대적이라고 믿어온 신념을 다시 바라보는 데서 시작한다. 중동의 파괴를 멈추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각자가 붙들고 있는 우상에 다시 질문하는 용기일지 모른다. ‘신’과 ‘민주주의’는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그것이 군림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야만으로 후퇴할 위험에 빠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