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가격제 등 시행 1.8조 부담
구매·용선·보험료 등도 급등
정부 ‘손실보존액 산식’ 깜깜이
에너지 절감 방안 등 구축 필요미국·이란 간 휴전 협상 속에 잠시 열렸던 호르무즈 해협이 또 다시 봉쇄됐다. 오락가락 휴전 논의에 “언젠가는 휴전이 되겠지”가 유일한 위안이다. 정유사들이 입은 피해액은 눈덩이다. 웃돈을 얹어 현물 원유를 구매하는 기간이 길어지는 가운데, 정부의 최고가격제 시행까지 겹치면서 현재까지 쌓인 누적 손실액만 2조8000억원을 넘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유사 관계자들의 속이 그야말로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정부는 정유사들의 손실액을 보전해주기로 했지만, 구체적인 산식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호르무즈 해협이 다시 봉쇄되는 등 불확실성이 계속되면서 정유사 사이에서는 ‘손실보전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확산하고 있다.
19일 정유업계에 따르면 정유 4사의 최근 2주간 평균 세전 공급가는 휘발유 1리터당 1121원으로, 지난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휘발유 가격과 비슷한 수준을 보이고 있다.
러·우 전쟁이 한창이던 2022년 5월 2주차 가격은 1142.51원, 2022년 7월 2주차는 1146.76원 수준이었다. 당시 당시 두바이유 가격은 100달러 선, 평균 환율은 1250~1290원이었다.
이번 중동전쟁 이후 두바이유 현물가는 최고 169달러까지 치솟는 등 100달러 선을 크게 웃돌고 있고, 평균 환율은 1489원까지 뛰었다. 러·우 전쟁 때보다 더 큰 유가·환율 부담을 안고 있지만 가격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더 큰 손해를 입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정유사들은 정부의 최고가격제와 함께 정한 ‘석유제품 매점매석행위 금지 고시에 따른 공급 및 판매량 제한 조치’에 따라 해당 월에 공급하기로 계획된 물량의 90% 이상을 반드시 주유소·대리점에 실제로 출고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유사들은 급등한 용선료와 원유 현물에 붙는 프리미엄 등 각종 비용을 추가로 내서라도 원유를 사와야 한다.
업계에서는 지난달부터 쌓인 정유 4사의 누적 손실액이 2조8000억원을 넘어섰다는 하소연도 나온다. 최고가격제 시행으로 국내 정유사가 국제 가격보다 불리한 가격으로 석유제품을 공급하면서 받는 부담은 최대 1조8000억원 수준으로 추산되는데 여기에 원유 구매비, 용선료, 보험료 등의 가격이 더 뛰면서 비용이 추가된다는 설명이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자체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봤을 때 정유 4사의 손해액이 2조8000억원이 넘는다는 결과가 나왔다”며 “최대한 정부 정책에 발을 맞추고 있지만 최고가격제에 대한 부담이 갈수록 누적되는 것도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정유사가 산정해 제출한 원가 등에 기반한 최고액정산위원회를 구성한 후 손실보전액을 산정해 이를 보상해주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아직 가이드라인만 나왔을 뿐, 구체적인 손실보전산식은 아직도 나오지 않은 상태다.
정부는 추가경정예산안(추경)으로 4조2000억원을 마련했지만, 이는 6개월간 정유사가 7000억원의 손해를 본다는 가정 하에 만들어졌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는 18일(현지시간) 저녁부터 호르무즈 해협을 폐쇄했다. 이란은 미국이 자국에 대한 해상 봉쇄를 해제하기 전에는 해협을 개방하지 않은다는 입장이다.
지난 주말 호르무즈 해협은 일시적으로 열려 유조선 10여척이 해협을 통과했다. 같은날 이란 군부가 재봉쇄를 발표하면서 유조선과 컨테이너선 등을 공격하면서 이후 통항은 다시 제한된 상황이다.
불확실성이 길어지면서 정유·화학업계는 올 2분기도 어려운 시황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산업연구원이 지난달 9~20일 국내 1500개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경기실사지수(BSI)를 조사한 결과 정유업종은 78로 전분기 대비 9포인트(p), 화학은 91로 7p 각각 하락했다. 2분기 전체 시황 전망 BSI가 90으로 전분기 대비 1p 내린 것을 감안하면 정유·화학업종의 어려움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방증한다.
업계에서는 최고가격제를 고수하기보다 이번 기회를 계기로 낭비되는 에너지를 줄이는 방안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제언이 나온다. 최고가격제는 정부 세수, 정유사 모두 부담이 큰 만큼 중장기적인 대응책 마련을 고려할 때라는 지적이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공개적으로 필요성을 인정했으나, 아직 구체적인 정부 조치가 뒤따르지 않고 있다.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1인당 에너지 소비량·원유소비량이 세계 최고수준을 기록해 왔다”며 “이번 위기를 기회로 삼아 최고가격제가 아니라 새는 에너지를 줄이고 절약하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좋은 방향”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어려운 하위계층은 선별적 복지로 지원하면서 미래세대에 너무 큰 짐을 지우지 않는 방향으로 접근이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