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속 ‘대한민국 대통령’이라 쓰인 단상 위로 윤석열이 등장한다. 비장한 듯한 표정으로 꺼낸 단어는 ‘계엄령’. 관객들은 순식간에 2024년 12월3일의 오후 10시27분으로 빨려 들어간다. 영화는 12·3 불법계엄 6개월 전 대통령 안가에서 시작된 계엄 논의부터 계엄 해제 요구안 가결까지의 과정이 숨 가쁘게 이어진다.
한국의 ‘원조 스타일리스트’ 이명세 감독이 ‘12·3 불법 계엄’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란 12.3>으로 22일 극장을 찾는다. 기존 다큐멘터리 처럼 내레이션이나 인터뷰를 사용하는 대신 영상자료, 녹취록 등을 통해 밝혀진 계엄의 막전막후를 AI 영상이나 애니메이션 등을 활용해 극영화처럼 이야기를 전개한다.
국회 청문회 등을 통해 드러난 윤석열의 지시사항, 어떻게든 계엄을 성공시키려는 사람들의 대화 내용이 담긴 군의 통신기록, 시민들의 모습도 영화 내내 교차한다. 특히 영화에 쓰인 영상 자료 대부분은 계엄령 발생 당시 283명의 시민들이 국회 등에서 직접 촬영한 것이다.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명세 감독은 이같은 다큐멘터리 연출을 ‘드라마타이즈’(Dramatize) 기법이라고 했다. 그는 “늘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이지만, 새롭지 않다면 굳이 만들 이유가 없다”며 “사실에 절대적으로 기반한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이지만, 연출을 통해 계엄 날 밤의 불안과 공포 등의 감정까지도 오롯이 집어넣고 싶었다. ‘다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다”고 말했다. “계엄이 선포되고 결의안이 가결되기까지 약 두시간 반은 어찌 보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기도 하니, 당시에 느꼈던 당혹감을 꿈처럼 표현하고 싶었다”고도 했다.
그런 맥락에서 다큐멘터리의 편집도 극영화와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했다. “영화 편집의 원칙은 C·시네마틱 E·이모셔널 D·드라마틱 H·유머 이 네 개거든요. 시네마틱은 화면이 모르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이어야 한다는 것, 이모셔널은 서정성, 드라마틱은 현실을 극처럼 표현하는 것, 그리고 그 현실 안에서 숨은 유머들을 담았어요. 계엄 소식을 들은 보좌관들이 ‘이럴 줄 알면 막살걸’이라는 문자를 남기는 장면도 울컥하면서 웃음이 나죠.”
그로선 <M>(2007) 이후 19년만에 장편 영화 작업이다. 굳이 ‘12·3 불법계엄’을 소재로 택한 이유를 묻자 “영화의 시작이 이미지가 떠오르는 순간이라고 한다면 뉴스공장 앞에 찾아온 군인의 눈빛을 봤을 때가 영화의 시작점이었다”며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과거 엄혹했던 유신, 5공화국 시절을 겪으며 ‘영화가 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자문을 했죠. 영화는 시대적인 것을 떠나 인간의 희로애락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첫사랑>(1993) 같은 작품을 찍었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그런 얘기를 만드는 게 두려워서 만들지 못했나’하는 부끄러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 감독은 “<란 12.3>의 주인공은 시민들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소개에 배우를 적는 란에도 ‘시민들’이라고 쓴 만큼 시민분들이 노벨평화상도 받고, 주연상도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영화도 있네?’ 라는 마음으로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작품들이 더 등장했으면 한다”고 했다. 이어 “1000만 영화 한 편보다 300만 영화 10편이 더 중요하다”며 “예술영화 지원사업 중 ‘아무도 안 볼 것 같은 영화’에 지원을 해주는 사업이 좋은 예다. 실험적인 작품이 더 나와야 한국 영화가 건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