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묘의 케이팝 내비]
한 걸그룹 소속사가 공식 채널에 긴급 공지를 올렸다. 멤버들이 전원 실종됐다는 것이다. 당황은 잠시, 글이 올라온 날은 4월 1일 만우절이었고 알고 보니 새로 발매될 싱글 ‘런어웨이(Runaway)’ 티저였다.
화제 주인공은 5인조 걸그룹 리센느(RESCENE). 2024년 데뷔한 이들은 늘 콘셉트에 진심이었다. 발표하는 음반마다 어울리는 향(香)을 지정했을 정도다. K팝이 서사적 콘셉트를 널리 활용한다는 건 이제 상식처럼 여겨지지만, 자세히 보면 이렇게까지 콘셉트에 몰두하는 이는 많지 않다. 리센느는 우아한 하우스 사운드를 중심으로 늘 현실에서 다섯 걸음쯤 동떨어진 듯한 공간을 만들었고, 그곳을 상징적인 메시지로 채워왔다.
야생의 공간을 선택한 소녀들
신곡 런어웨이 뮤직비디오의 무대는 엄격한 여학교다. 멤버들은 이곳을 탈주(‘런어웨이’)해 숲에서 자유를 누린다. K팝에서 수백 번은 반복된 클리셰다. 하지만 단골로 등장하던 한국식 권위주의적 공간이나 가톨릭계 사립학교와는 조금 다르다. 런어웨이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축과 엄숙한 복식, 슬그머니 공존하는 오리엔탈 소품 등으로 19세기 유럽의 기숙학교 같은 공간을 재현했다.
멤버들은 문 앞을 막은 톱니바퀴에 토슈즈를 쑤셔 넣어 기계를 정지시키고는 탈출한다. 이들이 향하는 숲은 화면을 스쳐가는 사슴과 활 등의 상징이 보여주듯이 ‘아르테미스’의 공간이다. 독립적이고 숭고한 사냥의 신. 극한의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발레를 포기하고, 사냥에 생존을 걸어야 하는 야생의 공간을 선택한 셈이다.
런어웨이의 숲은 여러 K팝 뮤직비디오에서 표현됐던 행복하고 포근한 공간이 아니다. 사위는 어슴푸레하고, 가시덩굴은 마법적으로 인간을 집어삼킨다. 불길하다. 즉 이들의 탈주는 단순히 속박으로부터 해방이 아니다. 안전하지만 폭압적인 구속을 떠나, 위험하고 불확실한 모험을 선택한 것이다. 이 장면들이 현대 여성의 삶, 혹은 걸그룹 산업에 대한 알레고리처럼 보인대도 지나친 생각은 아닐 듯하다.
곡은 속도감 있게 찰랑거리는 브레이크비트가 긴장과 설렘을 담아내고, 여러 대의 기타가 마치 정신을 바짝 차리려는 안간힘 같은 처연함으로 얹힌다. 백업 보컬은 아득한 공간감 속에서 ‘풀어놓은’ 듯이 울려댄다. 다소 하늘하늘한 무게감을 가진 미성이 많은 리센느의 음색은 이 곡에 잘 어울린다. 나직하게 긴장되다가 해방감과 감성을 확실하게 선사하는 후렴도 듣기 즐겁다. 브레이크비트가 내달리는 시간이 누적되면서 기분은 점차 고양된다. 감성적인 분위기를 즐기며 흘려듣기에도, 조금 집중해 감상하기에도 매력이 넘치는 곡이다. 리센느가 선보이는 개성적인 음악과 콘셉트의 세계에 앞으로 더 큰 기대를 걸어봐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