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사는 두 형제가 10년간의 치밀한 준비 끝에 가족을 데리고 탈북에 성공한 사연을 미 CNN 방송이 1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사연의 주인공은 남한 접경과 그리 멀지 않은 내륙 지역에 살던 김일혁·이혁 형제다.
탈북을 처음 제안했던 것은 10년 전 두 형제의 아버지 김모씨였다. 2013년 어느 날 김씨는 북한 사회에 희망이 없다면서 남한으로 가자고 가족들에게 제안했다.
이들이 생각한 탈출 경로는 중국이 아닌 바닷길이었다. 서해를 통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한국으로 건너가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의 첫 단계로 둘째 아들 이혁을 해안가로 보내 어업 기술을 배우게 했다. 이혁씨는 4~5년 만에 어업 기술을 익혀 자기 배를 갖게 됐다. 또 보안 요원들에게 뇌물을 바치며 신뢰를 쌓았다.
이들은 서해를 통한 탈북 계획을 위해 여러 시나리오를 검토했다. 일혁씨는 “우리가 남쪽으로 항해하면 북한군이 우리를 추격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얼마나 빨리 탐지되고 따라잡힐까. 우리는 모든 것을 계산했다”면서 “경비대는 낮에는 빨리 오지만 야간, 특히 악천후에는 추적이 더뎠다. 우리는 이를 여러 번 직접 시험해 봤다. 적발될 때마다 우리는 중범죄자 취급을 당했다”고 밝혔다.
형제는 몇 년에 걸쳐 적발될 때마다 “NLL 근처에서 조업할 수 있게 해달라. 거기만큼 어획량이 많은 곳이 없어서 도저히 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읍소했다. 당연히 그때마다 경비대에 뇌물도 두둑이 바쳤다.
김씨 형제 일가는 북한에서 제법 부유한 편이었다. 일혁씨는 “아버지께서 골동품이나 금을 거래하셨고, 석탄도 팔았다”고 말했다.
일혁씨 부부는 당국에 공식 등록된 대형 TV 외에도 중국 업자에게서 몰래 구입한 소형 TV도 보유하고 있었다. 소형 TV로는 서울에서 방송되는 10개 채널을 시청할 수 있었다.
남쪽 방송을 통해 보는 한국의 풍경은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밤에도 집집마다 들어오는 전기, 풍족한 음식, 자유로운 이동, 틀면 나오는 온수 등을 보면 마치 무한한 가능성이 열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처음 탈북을 제안했던 아버지는 그 꿈을 이루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많은 재산을 남겼고, 이는 탈북을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일혁씨는 2015년부터 2020년까지 5년 동안 가전제품을 취급하는 사업을 운영했는데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사업이 더욱 번창했다.
그는 “그때는 채소, 과일, 농산물을 팔았는데 (국경 봉쇄로 인해)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다. 매일 누군가 죽거나 강도를 당하거나 폭행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고 회상했다.
또 “쌀을 1㎏에 4000원에 사서 하룻밤 만에 8000원, 때로는 1만원에도 팔 수 있었다”면서 “내 사업은 번창했다. 상인들은 전보다 더 많이 벌었으나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은 더욱 굶주렸다”고 했다.
2023년 5월, 일혁씨의 아내는 임신 중기로 접어들었다. 이들은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탈북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봄철 폭풍으로 서해가 거칠어지자 김씨 가족은 기회를 포착했다. 폭우가 해안을 강타하고 레이더 가시거리가 줄어드는 날을 틈타 움직였다.
일단 형제는 이번에도 NLL 근처까지 조업을 하러 가겠다며 야간 경비대에게 뇌물을 찔러줬다.
이들은 해안을 따라 더 멀리까지 나가서 여자들을 몰래 태울 생각이었다. 북한에서 남자들은 큰 문제 없이 배에 탈 수 있지만, 여자가 배에 오를 경우 곧바로 탈북 등 불순한 의도를 의심을 받기 때문에 따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접선 장소에 가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지뢰밭을 건너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임신 중이던 일혁씨의 아내는 당초 탈북을 반대했다.
일혁씨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한국에 가야 한다고 아내를 설득했다. 아이들이 이런 나라(북한)에서 자라길 바라느냐고 물으며 결국 설득에 성공했다.
이들은 몇 년에 걸쳐 지뢰밭의 안전한 경로를 조사하고 외워 뒀다.
2023년 5월 6일, 사흘간 이어진 폭우가 서해를 휩쓰는 동안 목숨을 건 탈출이 시작됐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해도 품에 챙겼다.
일혁씨의 임신한 아내, 일혁씨의 모친, 처제 그리고 이혁씨의 장모가 지뢰밭을 무사히 건너 접선 장소에 몰래 정박해 있던 배에 올랐다.
이혁씨의 6살, 4살 된 두 아이는 배 위 삼베 자루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일혁씨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다들 철저히 침묵을 지켰다”면서 “배의 소음기를 개조해 최대한 엔진 소리를 줄이려고 했다. 우리는 빠른 걸음 속도 정도로 천천히 항해했다. 엔진 소리는 ‘쿵, 쿵, 쿵’ 하는 일정한 소리를 냈다. 그 속도라면 레이더가 우리를 그저 떠다니는 잔해물 정도로 인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 아이는 가는 내내 삼베 자루에 숨어 숨죽이고 있었다. 얘기해줄 때까지 절대 소리 내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약 2시간에 걸친 항해 끝에 김씨 가족의 배는 NLL을 건너 한국 영해로 들어섰다. 통상 중국으로 건너가 한국까지 들어오는 데 몇 달 또는 몇 년이 걸리는 탈북 경로와 비교하면 놀라운 속도였다.
김씨 가족이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연평도였다. 일혁씨는 “한밤중인데도 대낮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고 떠올렸다.
그는 마침내 탐조등을 켰고, 한국 해군 함정 한척이 이들 배를 향해 다가왔다.
해군은 확성기로 엔진이 고장 나 표류 중인지 물었다. 일혁씨는 “아니다. 엔진은 고장 나지 않았다. 한국에 오기 위해 탈북한 북한 어부다”라고 외쳤다.
탈북 4개월 만에 일혁씨 부부는 딸 예리를 얻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후 가족들은 서울의 한 연회장에 모여 예리의 첫 돌을 축하했다. 일혁씨는 멋진 턱시도를 입었고, 일혁씨 아내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었다.
이혁씨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자유를 얻은 삶에 적응하는 데 아직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때때로 한밤중에 잠에서 깨면 아직 북한에 있다는 착각을 하곤 합니다.”
그는 “열심히 일해 돈을 벌어 아이들이 남부럽지 않게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만의 꿈도 있지만 아직은 털어놓긴 어렵다며 그 꿈이 현실이 되면 밝히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 인터뷰는 이혁씨의 마지막 인터뷰가 됐다. 예리의 돌잔치 두달 뒤 이혁씨는 스쿠버다이빙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서울의 한 병원 장례식장에 모인 유족들은 슬픔에 잠겨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기 꺼려 했다.
북한을 탈출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아 아내와 두 아이는 아버지를 떠나보내게 됐다.

일혁씨는 10년간의 계획 끝에 동생이 자유를 누린 지 겨우 1년 6개월여 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깊은 상실감 속에서도 일혁씨는 그날 밤의 항해 자체를 기적으로 여기고 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더 큰 무언가로 이어진다고 믿게 됐고, 앞으로 나아갈 이유가 됐다.
일혁씨는 요리사가 되기 위한 강습과 더불어 지게차 운전 기술까지 배우고 있다. 북한에서의 삶과 탈북 경험을 알리는 데도 열심이다.
지난 3월에는 둘째 딸 예은이를 품에 안았다. 동생을 잃은 슬픔에서 빠져나와 다시금 웃음을 찾게 됐다. 딸을 품에 안고 작은 숨소리를 들을 때면 그간 견뎌냈던 모든 것이 단순히 탈북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나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