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문복산 정기산행과 시산제
전기電氣와 산악회는 공통점이 있다.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선을 타고 흘러 도시의 불을 밝히듯, 사람과 사람 사이의 뜨거운 마음이 흘러 튼튼한 울타리를 만들어 준다. 1999년 창립 이래 27년째 부산 전기인들의 든든한 '비빌 언덕'이 되어준 한국전기공사협회 부산산악회(이하 부산산악회) 시산제 산행에 동행했다. 꽃샘추위 성성한 날, 산악회원 60여 명과 경북 청도·경주 경계에 솟은 문복산(1,015m)을 찾았다.
부산산악회는 부산 지역 전기공사업계의 '모태' 같은 존재다. 현재 부산에는 1,000여 개의 전기공사 업체가 등록되어 있는데, 그중 80여 개의 회원사가 이곳에 몸담고 있다. 부산 내 여러 소모임 산악회들이 있지만, 대다수가 부산산악회를 거쳐 가거나 이곳의 운영 방식을 본떠 만들어졌을 만큼 상징성이 있다.
산악회의 가장 큰 특징은 '경쟁자'가 아닌 '식구'로 모인다는 점이다. 사실 같은 지역에서 입찰을 두고 다투는 업체의 사장들이 주말 취미까지 함께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회원들의 생각은 다르다. 산악회 조진화 회장은 경쟁자들로 구성된 모임이 30여 년 동안 이어온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경쟁 상대가 아닙니다. 나라 장터 입찰은 상당 부분 운이 작용하는 것인데, 그걸 두고 서로 헐뜯을 이유가 없지요. 오히려 같은 업을 하며 겪는 인력난이나 안전 규제 같은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산에서 만나 정보도 교환하고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가족이 되는 겁니다."
부전회(부산전기공사인 골프모임) 김태우 회장도 산악회원이다. 지금은 산행보다 골프를 즐기지만 "산악회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라며, "치열한 비즈니스 현장에서 잠시 벗어나 숨을 고르는 '심리적 해방구'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부산산악회 정기산행은 난이도에 따라 A, B 코스로 나뉘어 운영됐다. 걷기길과 산책 위주인 B코스를 이끄는 김병오 산행대장은 "무조건 정상을 가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 것이 산악회의 오랜 전통"이라고 한다. 산행 당일 컨디션이 좋으면 1,000m 고지를 밟고, 조금 힘들면 둘레길을 걷거나 베이스캠프 격의 식당에서 동료들을 기다린다.
상당수 산악회들은 신입 회원이 들어오지 않거나, 이름만 있고 활동이 없는데 반해 부산산악회는 올해에만 새로 가입한 회원이 여럿이다. 경주 산내면 대현리 방면에서 가파른 산길을 오르길 1시간쯤, 문복산의 백미인 드린바위에 올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고도를 높인 듯 1시간 전 산행을 시작했던 마을이 발아래에 놓이고, 산의 왕국이 펼쳐진다. 압도적인 경치를 배경으로 회원들이 기념사진을 찍는다.
20년 넘게 활동한 차점식(68)·이수금(63) 부부와 조옥래(75)·정명숙(68) 부부, 신입회원인 배정수(42)·양안영(35) 부부도 왔다. 이곳은 부부가 함께 활동하는 것이 특징이다. 차점식 회원은 경치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다.
"전기 일을 하다 보면 앞만 보고 달릴 때가 많은데, 산에 와서 이 드린바위를 보면 비로소 내가 얼마나 작고 겸손해야 하는지 배우게 됩니다. 집사람과 함께 20년을 산에 다녔으니, 산악회가 인생의 절반이나 다름없지요."
지난해 회장을 맡았던 김석자 회원은 산악회 활동이 회사 일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고 한다.
"회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다들 어려운 점이 있어요. 여기서 같이 땀 흘리고, 술 한 잔 나누면서 서로 문의하고, 조언해 주거든요. 현실적인 이야기를 가장 잘 이해하고 나눌 수 있는 곳이 산악회예요. 경쟁보다는 협업 관계이고, 비즈니스보다는 우정이 있는 사이예요."
부산 전기인들의 '원조' 산악회
드린바위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길, 만만치 않은 암릉 구간의 연속이다. 의외로 센 고도감의 바윗길이다. 두려워하는 여성 회원들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바위틈을 잡고 자연스럽게 서로 끌어주는 모습에서 산악회의 끈끈한 결속력이 느껴진다. 능선에 올라서자, 때 아닌 설경이다. 1,000m 능선에 잔설이 가득하다.
부산 사람들에게 눈은 마법의 주문일까? 올해 처음 눈을 본다는 회원도 있고, 이렇게 깨끗한 신설은 처음이라는 이도 있다. 다들 목소리 톤이 높아져서 사진기자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눈밭을 뒹굴고, 눈싸움을 한다. 중장년 회원들이 어린아이가 된 듯 장난기 넘치는 모습으로 변한다. 업체의 사장들이 직원 앞에서는 보여 주지 않는 모습을 서로에게는 가감 없이 드러내며, 솔직한 감정 표현을 한다.
산악회를 소개하며 "경쟁자가 아닌 식구"라고 했던 말이 조금씩 실감난다. 해발 1,015m 문복산 정상석 앞에 섰다. 가끔 개인행동을 하거나 고집 부리는 이도 있을 줄 알았는데, 톱니바퀴처럼 일사불란하다. 유병희 산행대장의 말에 따라 회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일반 산악회보다 다른 사람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이해가 빠르며, 분위기를 해치지 않고, 협조하며 적극적으로 즐기는 분위기다. 거드름 피우는 사람 없이 눈치 빠르고 센스 있게 행동한다. 2026년의 사장은 솔선수범하고 스마트해야 하는 걸 보여 주는 듯하다.
정상석 앞에 회원들이 단체로 서서 "화이팅!"을 외치며 함박웃음 짓는다. 시산제를 위해 곧장 하산한다.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영남알프스 인증 산이 아닌 탓에 문복산은 산길이 희미하다. 산행대장들이 선두와 후미에서 회원들을 이끈다. 다섯 명의 산행대장이 사전답사 산행을 하고, 뒤풀이 식당까지 맛을 보고 결정한단다. 전통이 쌓인 만큼 노하우도 체계를 갖췄다. 희미한 산길을 서로 의지해 4km의 계곡길을 내려선다.
산 아래서 풍겨오는 고소한 음식 냄새가 회원들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산제가 열린 곳은 김영환·김경자 부부가 운영하는 펜션이다. 산악회 창립 멤버인 부부는 회원들을 위해 기꺼이 마당을 내놓았다. 돼지머리와 문어, 수육, 시루떡을 비롯한 음식을 가득 차렸다. 먼저 온 B코스 회원들이 상을 차려 놓았다. 조진화 회장이 향을 피우는 것으로 시산제가 시작된다.
"올 한해도 우리 회원들 다치는 일 없이 안전하게 산을 오르내리게 해주시고, 각자의 사업장에도 만복이 깃들게 보살펴 주소서!"
조 회장의 간절한 축문에 이어 회원들이 차례로 절을 올린다. 올해 임기 시작인 추영호 부산전기공사협회장도 산악회의 오래된 회원이다. 그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거센 풍파 속에서도 와해되지 않고 꿋꿋이 자리를 지킨 이들이기에, 술잔의 의미가 더욱 남다르다"고 전하며, "일이 아무리 바빠도 산악회는 거의 빠진 적이 없다"고 말한다. 산악회는 부산 전기공사인들의 사랑방이자 소통 창구라는 그의 말이 실감난다.
요즘은 시산제를 생략하는 산악회가 많지만, 부산산악회는 창립 이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그 덕분인지 27년 역사 동안 한 건의 사고도 없었다는 것이 이들의 자랑이다.
싸온 음식을 데우고, 나누고, 옮기는 일이 한창이다. 60여 명의 회원들이 너나할 것 없이 빠르게 움직인다. 코로나19 이후 많은 산악회가 와해했지만, 부산산악회는 오히려 신규 회원이 늘었다. 그 비결 중 하나는 '부부 동반' 문화다. 이날 현장에도 많은 '사모님'들이 함께해 활기를 더했다.
조 회장의 아내 최민희씨는 "남편이 거의 주5일 술자리가 있어서, 이곳이 유일하게 남편과 함께 활동할 수 있는 모임이라 산악회 활동을 해야 더 금슬이 좋아진다"며 "부부 모임이라 건전하고 여행 다니듯 나올 수 있다"고 한다. 이제는 사모님들이 언니 동생 사이가 되어 음식을 나르고 뒤풀이를 챙기는 일에도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보탠다. 여성 파워도 적지 않다. 부산전기공사협회에 가입된 여성 대표들로 구성된 모임의 여성위원회 송채윤 회장도 산악회원이다.
"2007년 사업 시작하면서 산악회 활동했으니 20년이 다 되어 가네요. 오랫동안 활동하는 건 그만큼 좋아서죠. 매달 산행도 하고, 해외 산행도 1년에 한 번 이상 꼭 가거든요. 또 서로 같은 입장이다 보니 정보도 교환하고, 서로 이해하는 면이 많죠. 서먹한 옛날 친구 만나는 것보다 같은 일 하는 사람들이라 공감도 많이 되고, 한 달에 한 번 이상 꼭 보니까 그냥 가족이라 생각하면 돼요."
40대부터 70대까지 솔선수범
70대 원로 회원부터 40대 초반의 젊은 사장까지 세대교체도 원활하다. 특히 문영복 총무와 '막내급' 회원들은 궂은 일에 앞장선다. 다섯 명의 대장은 선배들의 조언을 얻고, 선배들은 젊은 피의 에너지를 받으며 상부상조한다. 권주영 부회장은 "젊을 적에는 A코스로 가고, 연배가 높아지면 B코스로 가면 되니까, 부담이 없다"며 "이런 시간이 30여 년간 쌓이면서 경쟁자가 아니라 산 친구가 되었다"고 말한다.
한국전기공사협회 김경주 이사와 산악회 김성일 부회장은 "부산산악회는 전국에서도 모범이자,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는 곳"이라며, "부산의 교통 요지인 서면에서 대절버스로 출발해 전국의 산을 누비니, 편리하다"고 말한다.
40대 초반의 정윤헌·안성찬 회원은 음식을 나르느라 바쁘다. 산악회 막내라서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매달 정기산행 나오면 몸도 개운하고, 마음도 재충전이 된다"며 "부부가 함께 나오니까 분위기도 좋고, 같은 전기 분야라서 선배들께 물어보면 진심을 담아서 대답해주시고, 잘 챙겨 준다"고 한다. 더불어 "또래 친구를 만나면 할 말이 금방 동 나는데, 산악회에 오면 통하는 부분이 많다"며 "선배들의 오랜 사업 경험이 도움이 되고 의지가 된다"고 설명한다. 유병희 산행대장은 "결국 산악회이기에 등산의 즐거움이 크다"고 한다.
"사회에서는 갑과 을이 있지만, 산에서는 공평합니다. 요령 피우지 않고 땀 흘린 만큼만 정상을 허락하죠. 그 희열을 우리 회원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제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부산산악회는 단순히 산만 타는 모임이 아니다. 지역 사회를 위한 봉사도 한다. 최근 경남 밀양 산불 피해 복구를 위해 회원들이 십시일반 모아 기부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산악회 조진화 회장은 이번 시산제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강조했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 가면 더 멀리, 더 아름답게 갈 수 있습니다. 산악회는 우리에게 단순한 친목 모임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의 앞길을 밝혀 주는 따뜻한 변압기이자, 어려울 때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접지선입니다."
전기는 끊기면 암흑이 오지만, 마음을 이으면 빛이 된다. 경쟁의 날을 세우기보다 우정의 울타리를 쌓아온 한국전기공사협회 부산산악회는, 경쟁의 굴레 속에서도 '상생'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밝은 지표였다.
인터뷰
한국전기공사협회 부산산악회 조진화 신임 회장
조진화 회장은 자타공인 '전기인'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전기를 전공했고, 대학과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전기' 한 우물만 팠다. 그에게 산이 찾아온 건 2015년, 독립해 대주전기를 창업하면서부터다. 한국전기공사협회에 등록하고 산악회에 발을 들였다.
"올해 쉰넷이 되었는데, 돌아보니 인생의 절반 이상을 전기와 함께했네요. 산악회 활동을 시작한 지 10년 남짓 됐지만, 그 사이 산은 삶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습니다. 5시간 정도 산행은 거뜬할 정도로 산 타는 재미에 빠져 살고 있죠."
한국전기공사협회 부산산악회는 1999년 최효원 초대 회장을 필두로 문을 열었다. 역대 회장단과 회원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현재는 80여 개의 회원사가 함께하는 든든한 공동체로 성장했다. 조 회장은 "단순히 산을 잘 타는 모임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잇는 힘을 가진 곳이 바로 우리 산악회"라고 자랑한다.
산악회를 통해 등산에 입문해 국내 명산을 비롯 중국의 태산, 노산, 일본의 다이센산과 북알프스까지 올랐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산에서의 순간을 묻자 "눈 덮인 한라산"을 꼽는다. 그는 "하얀 설국을 헤치고 백록담 정상에 섰을 때의 성취감은 평생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산에서 느끼는 가장 큰 행복은 소박하다.
"정상의 풍경도 좋지만, 사실 하산 후 회원들과 둘러앉아 막걸리 한 잔 나누며 웃음꽃 피울 때가 가장 행복해요. 산은 제게 스승 같습니다. 한 걸음씩 묵묵히 걷다 보면 결국 정상에 닿는다는 진리를 몸소 가르쳐 주거든요. 산은 정복하는 대상이 아니라 삶을 배우는 곳이라는 걸 매번 깨닫습니다."
전기공사 업계의 현실이 밝지만은 않다. 부산 건설 경기에 대해 "유례없는 불경기"라고 말한다. 아파트 미분양이 늘어나면서 건설 경기가 급격히 냉각되고 있는데, "아파트 한 동 지으면, 건설 인력, 유리회사, 시멘트 회사, 온갖 자재 업체, 가전 업체, 조경업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업종의 직원들이 일을 하게 된다"며 "아파트 건설은 경제가 순환하는 중요한 원동력"이라고 한다. 경기도 어렵지만, 극심한 인력난과 분리발주 문제 같은 어려운 경영 환경도 헤쳐 나가야 할 과제다. 조 회장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 또한 산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우리 회원들은 모두 같은 업종에서 고생하는 동료들입니다. 서로 어렵고 힘들 때 산에 오르며 고민을 나누죠. 함께 땀 흘리다 보면 혼자서는 해결 못 할 문제도 같이 의논하며 답을 찾게 됩니다. 산악회는 우리에게 단순한 취미 모임 그 이상이에요."
2026년, 조진화 회장은 새로운 각오로 회장직을 맡았다. 기존 선배들이 이어온 산악회 전통대로 "회원들의 화합, 건강, 행복을 나누는 따뜻하고 열린 산악회를 만드는 것"이 그의 포부다. "어느 산을 가장 좋아하냐"고 묻자 그는 "우리 산악회와 함께 가는 산"이라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그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웃음이 끊이지 않는 산악회를 만들고 싶다"고 가장 기본이며 중요한 덕목을 말한다.
월간산 4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