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카메라맨에서 농부가 된 정용권씨
지난 3월 9일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재산리 해발 700m 고지에는 사람 무릎 높이까지 함박눈이 쏟아졌다. 세상을 온통 하얗게 덮어버린 눈 덕분에 옛 화전민 가옥을 개조한 '용구니 아지트'는 고립된 설국雪國이 됐다.
3,500평 대지에 농어촌 민박과 사과 농장, 굴비 덕장을 갖춘 이곳은 정용권(64) 대표의 작업실이자 교육장, 그리고 치열한 휴식 공간이다.
정 대표는 이른 아침부터 눈을 치우는 대신 아궁이에 장작을 지폈다. 이 지독한 설경은 그에게 낯설지 않다. 20여 년 전, 히말라야와 북극의 눈보라 속에서 카메라를 들고 사투를 벌이던 그 시절의 풍경이 평창의 마당 위로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산악 사진가, 드론 촬영 전문가, 그리고 평창 산골의 '어설픈 농부'. 그를 수식하는 단어들은 매번 궤적을 달리했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만의 꽃을 피워 내는 개척자의 길 위에 서 있다.
뷰파인더로 쓴 한국 산악사의 전설적 현장
'용구니700굴비' 브랜드를 만든 정용권 대표의 인생 1막은 1996년 디지털 조선일보 영상제작부 카메라 감독 시절 한국외대 산악부 30주년 기념 '히말라야 아마다블람(6812m) 원정대'에 합류하면서다. 당시 등산의 'ㄷ' 자도 모르던 문외한을 히말라야로 이끈 것은 84학번 외대 산악부 출신인 아내였다.
"ENG 카메라가 뭔지도 모르고 무작정 따라나선 길이었죠. 그런데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아마다블람 원정 당시 박영석 대장을 운명처럼 만났다. 그 인연은 곧 '히말라야의 사나이' 고故 박영석과의 깊은 우정으로 이어졌다. 박 대장은 한 살 차이 형뻘인 정 대표에게 "우리와 같이 다큐멘터리 한번 만들어보자"며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SBS의 다큐멘터리 '히말라야 사나이 시리즈(1~6편)'다. 마나슬루를 시작으로 히말라야의 척박한 삶과 산악인들의 치열한 기록을 담아내며 그는 명실상부한 산악 영상 전문가로 우뚝 섰다.
1998년엔 조선닷컴에 원정 전 과정을 인터넷 생중계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1999년 그는 또 하나의 도전에 나섰다. KBS 일요스페셜 밀레니엄 특집으로 기획된 '백두대간 일시 종주' 촬영팀과 의기투합해 57일간 백두대간을 훑었다.
2003년에는 박 대장의 북극 원정에 동행하며 산악 영상 전문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영하 50℃의 혹한 속에서 박 대장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는 '죽음 곁에서의 삶'을 배웠다.
2004년 엄홍길 대장과 얄룽캉(8505m) 원정길에선 정상을 향한 집념 뒤에 숨겨진 인간적인 고뇌를 가장 가까이서 기록했다. 그에게 두 거물은 취재 대상이 아닌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였다. 산행은 특별한 인연을 불러왔다. 박영석, 엄홍길 대장에서 시작된 인연은 히말라야를 찾은 가수 이문세, 허영만 화백으로 이어졌다. 정 대표가 허 화백에게 "박 대장과 함께 히말라야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러면서 극지의 경험과 인간의 삶이라는 공통 언어로 서로 깊은 우정을 쌓았다.
이후 정 대표는 히말라야 베이스캠프 12곳을 누볐고, 백두대간 종주 3회와 100대 명산을 섭렵하며 산에 미쳐가기 시작했다.
아내를 잃고 평창에 정착하다
화려한 기록의 이면에는 가슴 아픈 상처가 있다. 정 대표의 삶을 진정으로 바꾼 것은 히말라야의 눈보라도, 북극의 추위도 아닌 아내의 부재였다. 2007년 산을 알려 주었던 아내는 한국여성산악회 소속으로 아콩카과 원정을 준비하던 중 북한산 훈련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아침에 웃으며 나갔던 아내가 저녁에 영안실 차가운 시신이 돼 돌아온 그날, 그의 삶은 완전히 무너졌다.
방황 끝에 평창으로 내려온 지 8년, 처음엔 그저 산사람들을 위한 작은 민박집이나 해볼까 했다. 농사를 모르던 도시 사내에게 재산리 마을 반장이 "상추부터 심어보자"며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흙과의 사투가 시작됐다. 상추로 시작한 농사는 열 가지 작물로 늘어났지만, 고난의 연속이었다. 집을 고치고 땅을 일구는 동안 대출과 빚은 쌓였고, 이자를 갚으려면 뼈 빠지게 일해야 했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히말라야를 올랐던 근성으로 버텼다.
3년 전에는 사과나무 500주를 심었다. 3500평 대지에 민박과 농사를 일군 것은 현역 이후의 삶에 대한 절박함 때문이었다.
"산을 기록하는 데 열정을 바친 인생인데 산에서 내려오고 나서도 뭔가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기록자로만 남기엔 내 인생이 너무 아까웠어요."
골바람이 빚은 기적 '평창 700 굴비'의 탄생
강원도 평창의 겨울바람은 칼날 같다. 대관령 능선을 타고 굽이쳐 내려오는 공기는 습기 한 점 없이 건조하고 차갑다. 이 매서운 바람 속에 노란 생선들이 군대 열을 맞추듯 매달려 있는 뜬금없는 풍경. 해발 700m 고지의 굴비다. "바다 굴비를 산바람으로 말리면 어떨까?" 하는 미친 착상은 비린내 없이 담백함을 극대화한 '평창 700 굴비'를 탄생시켰다.
"평창 골바람이면 굴비도 말릴 수 있습니다. 고정관념만 버리면 길은 어디에나 있죠."
정 대표는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게 이렇듯 끝없는 도전이 밑천이라고 했다. 운이 따랐는지 정 대표 친구가 선물해 준 '비닐하우스 돔'이 굴비 맛의 1등 공신이었다. 첫해 100마리에서 시작해 작년 2만마리, 올해도 9000마리의 굴비가 덕장에서 겨울바람을 맞고 있다. 한 마리씩 정성껏 건조하는 그의 굴비는 SNS를 통해 판매되는데 금세 매진된다.
"이 수익으로 대출 이자를 갚으며 70세까지 버티는 게 목표"라는 그의 말엔 현실적인 무게가 담겨 있다.
용구니 아지트는 늘 사람 향기로 가득하다. 가수 이문세는 이곳의 고요함에 반해 마당 카라반 카페에 '붉은 노을'이라는 이름을 직접 붙여 주었고, 식객 허영만 화백은 그의 굴비를 맛보고 "예술이다"라며 극찬했다.
정 대표는 자신을 '어설픈 농부'라 부르지만, 그의 손은 카메라를 벗어난 적 없었다. 최근에는 평창군의 의뢰를 받아 700만원짜리 영상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매일 유튜브와 SNS에 사진과 영상을 올린다. 드론으로 용구니 아지트의 새로운 풍경을 담기도 한다.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발버둥입니다. 시골에서 재미있게 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거든요."
"귀농, 멋대로 오지 마라." - ­인생 마지막 원정의 꿈
히말라야를 찍던 남자는 이제 재산 3리 4반장으로 불릴 정도로 농부가 됐다.
그의 꿈은 아직도 많다. 그중 하나가 귀농 강사다. 자신의 뼈아픈 시행착오와 빚의 무게를 견뎌온 경험을 바탕으로 귀농인들의 정착을 돕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조언은 서늘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귀농·귀촌 이렇게 하면 망한다'고 조언해 주는 강사가 되고 싶습니다. 귀농은 준비 없이 멋대로 하면 절대 안 됩니다. 도시에서 낭만만 생각하고 내려오면 대부분 실패합니다."
정 대표는 환상 대신 솔직한 말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자연을 좋아하는 이들이 용구니 아지트의 '붉은 노을' 카페를 찾아와 세상 시름을 달래며 무한 휴식을 갖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정 대표는 "이것이 내가 추구하는 인생의 마지막 베이스캠프"라고 했다.
월간산 4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