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써레봉전북 완주 경천면에 있는 써레봉(660m)은 신선이 노닐고 선녀가 살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첩첩산중 오지다. 써레봉 좌우에 있는 신선봉(369m), 신선남봉(373m), 선녀봉(664m), 선녀남봉(677m) 등 지명부터 예사롭지 않아서 은근한 기대와 설렘이 앞선다.
써레봉은 명산의 조건을 두루 갖췄다. 자연 생태계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신흥계곡에는 1급수에만 사는 민물고기와 멸종위기의 나비들이 서식한다. 신선과 선녀의 놀이터였을 법한 정상부 암릉지대는 노송이 어우러진 탁월한 조망이 일품이며, 바위를 오르고 내리는 짜릿한 스릴을 즐길 수 있다. 신선이 선녀를 만나기 위해 잠시 걸쳐 둔 써레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일까? 산이 얼마나 사나운 모양이기에 날카로운 써레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상어 이빨 모양인 써레는 논과 밭을 갈 때 사용하는데, 소가 써레를 끌고 가면 흙을 잘게 부수는 역할을 한다. 써레봉으로 불리는 산들의 특징은 바위들이 같은 방향으로 솟구친 모습이라는 점이다. 지리산 써레봉, 내장산 써레봉, 고창 방장산 쓰리봉(써레봉) 등 많이 있지만 써레와 가장 닮은꼴은 완주 써레봉이다. 멀리서 보면 암봉들이 뾰족뾰족하게 돌출되어 있어, 마치 누군가 산 위에 써레를 세워 놓은 모양이다.
선답자의 산행 표지가 유일한 길잡이 써레봉은 금강정맥(신산경표 기준)의 주능선인 칠백이고지에서 선녀남봉으로 가는 길에 살짝 비켜 있는 능선에 있다. 써레봉만 목표로 한다면 두 가지 코스를 이용할 수 있다. 구재리에서 써레봉을 지난 후 선녀남봉을 거쳐 금강정맥 남쪽 능선 방향 6분 거리에 있는 갈림길에서 절골로 내려가는 방법이 있다. 이 경우 크고 작은 폭포와 원시림 같은 계곡 산행을 즐길 수 있다.
또 하나는 선녀남봉에서 절골로 내려가지 않고 금강정맥을 계속 따라가다가 575봉에서 금강정맥을 버리고 용궁산장 식당으로 내려가는 방법이다. 선녀남봉에서 약 1시간 40분 소요된다. 더러는 구재리, 써레봉, 선녀남봉, 불명산을 거쳐 화암사로 내려가는 구간도 많이 찾는다. 안도현 시인이 '잘 늙은 절'이라 극찬했던 화암사와 국보 제316호 극락전, 보물 제662호 우화루를 볼 수 있다.
써레봉에는 두 가지가 없다. 먼저, 지자체에서 설치한 이정표와 산행 안내도가 전혀 없다. 그리고 안전을 위한 어떠한 시설도 없다. 오직 선답자들이 남긴 산행 표지와 개인이 설치한 로프가 전부다. "써레봉은 암릉이 매우 빼어나 전국 각지에서 많이 찾는 산인데, 암릉 구간에 안전사고가 우려된다"고 완주군청에 건의하자, "써레봉은 지정 등산로가 아니다. 칠백이고지와 불명산은 관리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향후 관리 계획은 있냐는 물음에 "인력과 예산 부족으로 주요 등산로 정비에도 손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답했다.
내심 다행이라 생각되는 건 무슨 심보일까? 조금만 유명세를 타면 데크 계단과 철 기둥을 박고 로프를 칭칭 감아 거친 손맛을 즐기는 산꾼들에게 매력이 반감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조건들이 도전을 망설이지 않는 산꾼에게는 최고의 성찬이나 다름없다. 써레봉 능선은 등산로가 정비되지 않았기에 개척 산행 수준을 각오해야 하지만, 촘촘히 있는 표지 덕분에 방향 찾기에는 큰 무리가 없다. 다만, 기본적인 안내 표지판이라도 설치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들머리인 구재리에는 아홉 명의 재상이나 부자가 나올 터라는 안내문이 있다. '마을의 진산인 신선봉에는 신선대라 불리는 바둑판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고, 인근에는 선녀들이 내려와서 선녀탕에서 목욕을 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구재제1교 다리를 지나면 창원 황씨 가족묘 옆으로 등산로가 시작된다. 선녀남봉까지는 약 1시간 가까이 오르막이다. 2013년 봄에 큰 산불이 발생해 큰 나무가 없고, 곳곳에 검게 그을린 자국들이 많다. 잡목과 청미래 덩굴이 발목을 잡고 있어서 미리 준비한 전지가위로 자르면서 진행한다.
신선남봉에는 작은 돌탑이 있다. 해외 고봉 산행에서 이정표 구실을 하는 케른처럼 누군가 남겨놓은 배려에 감사하다. 건너편 보이는 신선봉까지는 0.6km, 왕복 30분이면 다녀오지만 큰 의미는 없다. 머지않아 커다란 '세인청소년수련원 극기훈련 정상' 안내판이 눈에 띈다. 오래된 등산지도를 보면 신선봉 아래쪽에 '가나안복민학교'와 '세인청소년수련원' 등이 표기되어 있다. 세인청소년수련원은 기독교 학교인 세인고등학교에서 운영한 시설로, 표지판 있는 곳까지 극기훈련 코스로 이용됐다고 한다. 수련원은 이집트 시나이반도에 있는 호렙산(시나이산 2,285m)의 이름을 따서 이 일대를 '호렙산'으로 불렀다 한다. 수련원은 2001년에 개원했다가 현재는 이용되지 않는다.
안전 확인, 또 안전 확인 부드러운 능선은 서봉을 지나면서부터 점차 거칠어지기 시작하며 집채만 한 바위들이 길을 막는다. 안전한 우회로가 있지만 수북한 굴참나무 낙엽으로 인해 걸음이 무척 조심스럽다. 본격적인 암릉지대에 들어서면 처음부터 유격훈련장을 방불케 한다. 로프를 타고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설치한 지 오래된 로프이기에 반드시 안전을 확인하고 이용하는 것이 좋다. 써레봉 바위에는 명물이 있다. 비스듬한 암반을 뚫고 자란 멋진 노송의 자태가 경이롭다. 아기자한 암릉 좌우는 수직 낭떠러지여서 손발로 기어가다시피 한다. 이곳들의 바위들은 화강암과 다르게 시퍼렇게 날이 선 석영암질의 판석 모양이다.
암릉에는 수십 명이 앉아도 좋을 만큼 넉넉한 너럭바위도 있다. 시원한 조망은 남북으로 모두 막힘이 없다. 북쪽으로는 천등산과 대둔산, 남쪽으로는 운장산·연석산·운암산·장군봉 등 전북의 명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 있다. 써레봉 정상은 자칫하면 우회로로 빠지기 쉽기에 길을 잘 살펴야 한다. 정상에는 산꾼들이 쌓은 작은 돌탑이 전부이고, 잡목들에 의해 시야는 막혀 있다. 아찔한 높이의 암봉을 내려가는 약 25m 길이의 로프는 두 번에 걸쳐 내려갈 수 있다. 발 디딜 곳이 있어서 보기보다는 위험하지 않다.
선녀남봉은 작은 돌탑이 이정표다. 금강정맥과 합류한다. 북쪽으로는 선녀봉과 불명산 방향이고, 남쪽은 절골과 용궁산장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절골로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 내리막으로 길이 자주 끊어지지만 산행 표지를 참고해 방향만 분명히 하면 된다. 돌무더기 같은 세 개의 숯가마 터를 지나고 멍석폭포부터는 시원한 물이 흐르는 계곡을 만날 수 있다.
용궁산장으로 가는 능선은 575봉에서 갈린다. 고도가 점차 낮아지지만 7~8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며 써레봉 주능선의 우람한 자태를 가까이 볼 수 있다. 산죽으로 길이 막힌 곳에서 오른쪽으로 빠지면 용궁산장이다. 신흥계곡이 흐르는 S라인의 포장도로를 따라가는 것도 지루하지 않다. 신흥계곡은 만경강의 최상류다. 수서생물이 풍부해 2020년 생태자연도 1급지로 인정받았다. 3km 정도 오염되지 않은 계곡은 여름철 숨은 피서지로 인기 있다. 거대한 암벽이 석문처럼 버티고 있는 곳을 지나면 들머리인 구제제1교가 나온다. 용궁산장에서 구재제1교까지 2km, 30분 정도 걸린다.
산행길잡이 구재제1교-묘-신선남봉-세인수련원 표지판-서봉-암릉지대-써레봉-우회길-575봉-445봉-산죽-용궁산장-포장도로(신흥계곡)-석문-구재제1교(11km, 5시간 40분)
구재제1교-묘-신선남봉-세인수련원 표지판-서봉-암릉지대-써레봉-우회길-숯가마 터-멍석폭포-계곡 합수지점-절골계곡-전주이씨 집-수신관(9km, 5시간)
내비게이션에 '구재리1교'로 입력, 다리 건너편 묘를 따라가면 산행 시작이다. 신선남봉까지 작은 잡목들이 많아서 전지가위가 있으면 좋다. 신선남봉 이후부터는 외길이고 산행 표지가 많아서 길이 분명하다. 암릉지대에 설치된 로프는 낡아서 튼튼한 로프를 준비해 가는 것이 좋다. 이정표가 전혀 없기에 방향 잡기에 애매한 지점이 많지만, 산행 표지를 잘 살피면 된다. 선녀남봉에서 절골은 첫 길 찾기가 어렵다. 계곡이 깊어서 일몰시간을 잘 계산해야 한다. 써레봉은 바위가 미끄러운 겨울철과 우천 시에는 피하는 것이 좋다.
교통 서울 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전주고속버스터미널까지는 2시간 40분 소요되며, 요금은 1만4,300원이다. 오전 5시 30분부터 10~15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전북대학교에서 고산터미널까지 535번 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한다. 고산터미널에서 화암사행 군내버스를 타고 구재리 입구에서 하차한다. 하루 6회(07:30, 09:20, 11:30, 13:00, 15:10, 18:20) 운행하며, 요금은 1,500원이다.
맛집(지역번호 061) 운주농협하나로마트 로터리 부근에 식당이 밀집해 있다. 용복일오삼(214-3690) 식당은 명인의 손맛이 담긴 두부요리가 유명하다. 청국장(1만 원), 두부전골(1만 원), 모두부(6,000원). 정승댁 식당(262-7738)은 울대찜이 별미다. 의외로 살이 많고, 씹히는 맛도 고소하다. 울대찜(1만5,000원), 김치갈비찜(1만8,000원). 경천추어탕(263-3348)은 근처에서 직접 미꾸라지 양식을 하기 때문에 신선한 재료를 보장한다. 뚝배기추어탕(1만 원), 우렁추어탕(1만2,000원), 통매운탕(1만2,000원)
월간산 4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