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국제학술지 '네이처' 표지에는 프랑스 예술가 소니아 들로네와 로베르 들로네의 ‘오르피즘’에서 영감을 받은 원형 기하학 그림이 실렸다. 오르피즘은 색채를 회화의 본질적 구성요소로 삼아 공간과 시간의 동시성을 음악적 조화로 추구한 예술 운동이다. 공간은 기하학적 형태미로 시간은 리듬으로 표현된다.
표지에선 크고 작은 원들이 겹치고 교차하며 노랑·파랑·빨강·올리브빛 색면을 만들어낸다. 원 하나하나는 암세포가 생존을 위해 넘나드는 각기 다른 세포 상태를 뜻한다. 원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생겨나는 색의 조합은 그 상태를 결정짓는 유전자 조절의 무수한 경우의 수다.
뉴욕대 랭곤 헬스 연구팀이 암세포의 환경 적응 방식을 설명하는 새 모델을 15일(현지시각) 네이처 관점 논문(Perspective)으로 발표했다. 난소암 세포 실험 결과와 그간 축적된 연구들을 종합한 결과다.
연구팀이 직접 수행한 난소암 세포 실험이 근거 중 하나다. 항암제 농도를 단계적으로 높이며 암세포를 반복 노출시키자 세포는 점점 더 강한 내성을 갖게 됐다. 이 과정에서 특정 단백질 계열이 주목됐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빠르게 활성화되며 유전자 수백 개의 활성을 켜고 끄는 전사인자 단백질 무리 'AP-1'이다.
AP-1이 유전자 조절 부위에 접근하기 쉬운 상태로 바뀐 것이다. 약물을 제거하면 변화가 부분적으로 되돌아갔지만 다시 노출되자 빠르게 재활성화됐다. 세포가 일종의 '기억'을 형성한 셈이다.
AP-1은 수십 년간 연구됐지만 약물 내성과 연결된 역할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연구팀이 새롭게 제안하는 것은 DNA 서열 자체가 바뀌는 돌연변이가 아니다. 유전자를 켜고 끄는 방식과 생존에 유리했던 변화를 기억하는 능력이 내성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AP-1의 구성 단백질들은 둘씩 짝을 지어 '이합체(dimer)'를 형성한다. 어떤 단백질끼리 짝을 짓느냐에 따라 조절하는 유전자 집합이 달라지고 가능한 조합의 수가 매우 많다는 점이 핵심이다.
암세포는 이 조합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생존에 유리한 패턴을 찾는다.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성공한 이합체는 안정화되고 효과 없는 것들은 약화된다. 진화 알고리즘과 닮은 방식이다. 적합한 조합이 찾아지면 그 상태는 고착돼 이후 세대 세포에 전달된다. 결국 어떤 항암제도 듣지 않는 내성 종양으로 이어진다.
DNA 서열은 바뀌지 않지만 유전자가 읽히는 방식이 달라지는 후성유전학적 변화를 통해 세포 기억으로 굳어진다. DNA 서열은 그대로지만 유전자가 읽히는 방식이 달라지고 그 변화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연구팀은 이를 세포 수준의 '학습'으로 본다. 암세포가 치료 환경에 적응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한다는 의미다.
연구팀은 기존 치료법이 암세포의 특정 상태만 표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본다. 암세포가 적응하는 능력 자체를 차단해야 내성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AP-1이 관여하는 조합·피드백·기억 메커니즘을 동시에 겨냥하는 치료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연구팀은 암 외의 분야에도 이 메커니즘을 적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뇌에서의 기억 형성, 피부 상처 치유 같은 정상적인 생물학적 기능에도 유사한 AP-1 매개 과정이 작용한다는 증거가 있다.
이타이 야나이 교수는 "세포가 치료에 적응하기 위해 상태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그 메커니즘은 불분명했다”며 “이번 연구가 진행성 암이 사실상 치료 불가능해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구스타보 프란사 박사후연구원은 "어떤 AP-1 쌍이 특정 치료에 대한 내성을 유발하는지 파악하면 기존 암 치료와 항적응 제제를 결합한 더 오래 지속되는 치료법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향후 연구팀은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와 단일세포 분석 기술로 AP-1 조합을 체계적으로 지도화하고 각 조합이 약물 내성에 기여하는 방식을 규명할 계획이다.
<참고자료>
nature.com/articles/s41586-026-10269-1